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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지나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김용순 2005. 11. 25. 오전 12:00
5517
김용순 2005. 11. 25. 오전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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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70년11월13일
노동자로 태어나
인간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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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저 스물두 해의 아픈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에 온몸을 부딪쳐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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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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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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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13일, 삼동친목회와 청계피복노조가 일천만
노동자의 뜻을 모아 조영래의 글과 장일순의 글씨로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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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변호사가 좌익이면 그 속편을 쓴 나도 좌익인가?
1970년 11월 19일 장례식 때 세워진 비석이다. ‘기독청년 전태일의 묘, 삼백만 근로자 대표’라는 묘비명 측면과 뒷면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나의 죽엄을 헛되이 하지 말라! 삼백만 근로자의 권익옹호를 위하여 투쟁타가 분신으로 기초석이 되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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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변호사와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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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로 태어나 인간으로 돌아간 전태일
변호사로 태어나 인간으로 돌아간 조영래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나란히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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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조선일보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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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의 한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낯선 도회지의 길거리를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다니며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리야카 뒤밀이로 허기진 밑바닥 삶을 이어오다가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된 그는 거기에서 노동자의 청춘과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는 지옥과 같은 노동현실을 보았다. 허리도 펼 수 없는 비좁은 다락방의 먼지 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본 채 하루 16시간을 기계처럼 혹사 당하는 어린 소녀들의 어두운 눈망울 앞에 절망과 분노로 몸서리치던 그는 뜻있는 재단사들을 삼동친목회로 묶어 작업시간 단축, 건강진단 실시, 임금인상, 다락방 철폐 등 ‘인간 최소한의 요구’를 내세우고 싸우던 끝에 업주들과 경찰의 폭력 앞에 저지당하자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며 스스로 스스로 몸을 불살라 스물두 해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이 폭탄과 같은 죽음이 사람들의 억눌린 가슴가슴을 뒤흔들어 저 숨막히는 분단과 독재의 형틀에 묶여있던 노동운동의 오랜 침묵을 깨뜨렸고 굴종과 패배를 모르는 그의 불타는 넋은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고 이소선 어머니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폭압에 맞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무한한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아아, 저 스물두 해의 아픈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에 온몸을 부딪쳐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지나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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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13일, 삼동친목회와 청계피복노조가 일천만 노동자의 뜻을 모아 조영래의 글과 장일순의 글씨로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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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아버지 전상수는 봉제노동자였다. 그는 집에 재봉틀 한두 대를 놓고 피복제조업을 하거나 삯일을 했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하면서 좌절감이 쌓이자 그는 이를 폭음으로 풀었고 술주정과 화풀이는 고스란히 아내와 자식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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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전태일이 여섯 살 되던 해. 그때까지 부산에서 소규모 양복제조업을 하고 있던 전상수는 염색공장에 맡긴 원단이 오랜 장마를 만나 상해버리는 바람에 재기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는다. 그는 무작정 솔가해 서울로 온다. 일자리를 잡지 못한 그는 평화시장, 중부시장 등을 떠돌아다녔다. 사실상 실업자와 같은 생활이 2년여 이어졌다.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서울 거리를 헤매는 동안 아내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서울역 근처에서 노숙, 동냥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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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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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국민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전태일은 여덟 살 때 남대문 초등공민학교 2학년에 편입, 처음으로 학교생활을 한다. 전태일은 남대문 초등공민학교에서 남대문 국민학교로 편입시험을 치러 합격한다. 잠시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또다시 사기를 당하면서 일가는 거리로 내몰렸고, 열두 살의 전태일은 소년가장이 되어야 했다. 결국 4학년 초에 학교를 중퇴한다. 1년여의 가출을 끝낸 전태일은 대구에서 가족과 만나 다시 안정된 생활을 한다. 1963년 초, 그는 대구의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잊을 수 없는 학교생활을 한다. 1년도 못되는 학창시절을 전태일은 수기에서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이라고 썼다. 학교공부는 그게 끝이었다. 아버지는 또다시 술을 마셨고 집안에서는 구타와 고함과 울음이 끊이질 않았다. 절대빈곤과 가정 폭력 속에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가 평화시장의 임금노동자가 된 것은 1965년 가을이었다. 학생복 맞춤집의 ‘시다 구함’ 광고를 보고 찾아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한다. 그러나 ‘기술을 배워 어머니, 아버지를 편히 모시겠다’던 전태일은 소망을 키워보기도 전에 평화시장의 지옥과 같은 처참한 노동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시다 여공들은 스스로의 젊음과 소망과 건강과 생명을 그날그날 갉아먹으며 살아야 하는 매혈(賣血) 인생이라고 전태일은 생각했다.
전태일은 이때 피땀 흘린 대가를 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해 억울함을 느낀다. 1966년 말, 그는 미싱사를 그만두고 재단사를 택한다. ‘전태일 평전’은 이 대목을 이렇게 쓰고 있다. ‘2년여 고통의 기간을 거쳐 눈앞에 보이는 불의한 기업주의 횡포를 명료하게 목격하였을 때, 그는 가족에게 돈 몇 푼을 다달이 더 보태려고 고분고분 죽어지내는 것보다는 이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여 무언가 싸움에 나서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은 재단사로서 어린 여공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그가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값을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곤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떼어놓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왈칵 토해냈다. 처녀는 폐결핵 3기로 판명되었고 해고당했다. 이 사건은 전태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다.
1968년 전태일은 아버지로부터 ‘노동법이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구입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 때부터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를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만드는 준비를 한다. 1969년 쌍문동의 전태일 집에서 ‘바보회’가 만들어진다. 평화시장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모임이었다. 그는 재단사 일을 하는 틈틈이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 내용을 알려주며 현재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일깨워주었다. 이때부터 전태일은 사업주들에게 위험한 인물로 경계 대상이 되었고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을 떠나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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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9월, 평화시장에 다시 나타난 전태일은 바보회보다 한 단계 진전된 삼동친목회를 만든다. 삼동친목회를 통해 평화시장의 실태를 조사해 노동청에 진정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신문기자를 만나 사정을 설명했고 마침내 평화시장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문에 나자 사업주와 관계기관은 대화에 응했고 그럴 듯한 말로 많은 약속을 한다. 그러나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전태일은 10월 20일 노동청 앞에서 시위를 하기로 한다. 하지만 근로감독관의 설득에 데모 계획은 연기되고, 또 연기되었다.
결국 삼동회원들은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한다. 11월 13일 오후 1시, 전투경찰은 평화시장을 에워쌌고 사업자들은 노동자들이 현장에 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때 전태일이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나타나 친구에게 성냥을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온몸에 불이 붙은 전태일은 평화시장 앞길을 내달리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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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리곤 쓰러졌다. 삼동회원들은 불을 끄려 달려들었다. 순간 다시 벌떡 일어난 전태일이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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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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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사후 35년, 평화시장의 오늘미싱 소리와 함께 생존의 싸움도 여전 봉제공장, 수입품에 밀려 일감 줄어들고 근로조건도 점점 뒷걸음질‘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창신동.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주택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드르륵, 드르륵’ 하는 미싱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겉에서 보기엔 평범한 주택건물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미싱이 돌아가는 소규모 봉제공장이다. 대부분 10평 미만의 공장에 3~4명이 미싱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 입구에는 ‘객공·하청 구함’ ‘미싱사·시다 구함’ 등과 같은 구인광고가 연락처와 함께 붙어있다.
▲ 1960~1970년대 평화시장 다락방 공장의 모습.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에는 더이상 피복공장이 남아있지 않다. 공장은 대부분 동대문을 중심으로 근방 1.5㎞ 지역에 위치한 창신동, 신당동, 숭인동 일대 주택가로 들어갔다. 현재 창신동에서 숭인동에 걸쳐 있는 공장 수만 3000개 정도로 추산된다. ‘사단법인 동대문의류봉제협회’는 이 중 70% 이상이 5인 이하의 영세업체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근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만들어진 수입의류가 전체 의류시장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일감이 줄어들자 10인 이상의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은 정상 가동이 어렵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대규모 공장 대신 집에 미싱기계를 들여놓고 시다만 고용해 일감을 떼어다 작업하는 영세업체들이 늘고 있다.
일감이 안정적으로 들어오지 않다보니 일이 몰릴 때는 1970년대처럼 하루 14시간 이상씩도 일할 때가 있다. 협회에 따르면 수입품과의 가격경쟁으로 납품가가 5년 전 수준으로 하락해 현재 청바지 한 벌을 납품하고 받는 돈은 3000원 정도다. 1년 동안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된다고 할 때 현재 시다의 월급은 한 달에 110만원 내외, 미싱사의 경우 150만~180만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감 부족으로 1년에 서너 달 정도는 공장이 멈추곤 한다.
최근 2~3년 전부터 이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중요한 변화는 하청과 객공(客工)의 증가다. 객공이란 업주가 미싱사에게 기계와 장소를 빌려주고 미싱사는 옷을 만드는 수량에 따라 공임을 받아가는 제도를 말한다. 전태일이 일하던 1966~1970년 당시 미싱사들은 업주에게 객공 방식으로 공임을 받아갔다. 옷을 더 많이 만들수록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미싱사들은 자신의 건강은 아랑곳않고 과도하게 업무에 매달렸다. 일이 많을 때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일이 아예 없을 때는 한 푼도 받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제도는 당시 청계천 노동자의 생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구조적 병폐로 꼽혔다. 결국 1976년 청계피복노조는 단체협약을 통해 객공 미싱사들이 일감이 없을 때도 기본급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그런데 최근 일감이 줄어들면서 객공을 통해서라도 생계를 이어가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객공을 할 경우 업주와 미싱사의 분배비율은 보통 4:6이다.
▲ 2005년 동대문구 창신동의 한 봉제공장 내부.
기술자들의 노령화도 커다란 문제다. 현재 업계는 이곳에서 일하는 미싱사들의 평균 연령이 40세 이상인 것으로 추정한다. 시다에서 시작해 미싱사가 되기까지 보통 6년 정도 걸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약 10~15년 전부터 젊은 신규인력의 유입이 사실상 중단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동안은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다 시다로 써왔는데 당국의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인해 이마저도 어려워지고 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젊은 시절부터 줄곧 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전업을 생각할 수도 없다. 창신동의 봉제공장에서 15년째 일하고 있는 김모(34)씨는 “젊었을 때는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대문 의류봉제협회’의 차경남 전무이사는 “국내 농산물 수입액이 5억달러 수준인데 반해 의류 수입액은 28억달러에 이른다”며 “이 같은 추세로 가면 앞으로 3년 내에 국내 의류제조업체의 70% 정도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조업자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노동시간 준수와 같은 근로기준법을 있는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서울의류업노동조합’의 김정호 위원장은 “사장이 함께 일을 하며 2명, 3명을 고용하는 영세업체라 하더라도 임금을 체불하거나 떼어먹는 등의 근로기준법 위반사례가 발생하는 것을 좌시할 순 없다”며 “다만 시다 1명을 고용해서 집에서 일감을 떼어다 일하는 식의 가내수공업 같은 경우 근로기준법의 적용이 어렵다면 이에 대한 관련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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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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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속편/부제/조영래 변호사에게 바치는 헌정사>
글쓴이 김용순(내용 별첨)
.....................................................................................................
시스템 클럽 지만원 대표가 전 월간 조선 조갑제 사장과
서정갑 (예)대령(rotc연대2기) 휘하에 두고 지향하는 사회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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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좌익이 쓴 전태일 이야기”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겉만 번드르하게 도색-미화한 것이고, 실상은 농촌을 더 못살게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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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재단 일을 하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늘 끼고 다니면서 노동법을 공부했다.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고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기계취급을 받아 왔다’고 노동자들을 일깨웠다.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대로 일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자고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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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는 쌍문동, 도봉산 기슭에 있는 판잣집에 살았다. 1970년11월12일 아침,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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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내일은 좀 심상치가 않습니다.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구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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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 앞, 현수막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시위대 옆 골목에서 불길로 온 몸에 불길을 뒤집어 쓴 사람이 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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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바로 전태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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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2”의 195쪽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 편지 5”의 203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두 책에 묘사 돼 있는 전태일이 대동소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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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들을 읽으면 누가 봐도 좌익 진영이 쓴 글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전태일을 영웅으로 묘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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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의 글에서 자가당착이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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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만일 자기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화살이 되려 했다면 어머니에게 오후 한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아들이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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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휘발유를 뿌리고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까지는 이미 노동세력과 사전에 기획돼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어머니 더러 나와서 ‘구경하라’고 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누군가가 골목에서 불을 지르고 강제로 내보냈을 것이라는 게 제 추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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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 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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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불을 붙이려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성냥불을 그어댔을 것입니다. 옆 골목에서 이미 불화살이 되어 나온 전태일, 그 불을 전태일이 붙였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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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전태일처럼 불화살이 된 노동자 17명 중에는 ‘장엄한 공경만 연기하라’고 속여 놓고는 여러 사람들이 바람을 잡는 틈을 이용하여 누군가가 성냥불을 그어댄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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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970년에 평화시장에 있었던 재봉 일은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가장 안전하고 편한 직종에 속했습니다. 1990년까지도 구리시에는 원진레이온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일 한 사람들은 뼈가 녹고 살이 썩었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또 어땠습니까? 고엽제는 또 어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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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좌익들은 만화와 동화식으로 역사를 왜곡하여 학교 도서관에 마구 뿌립니다. 그런데 우익에서는 나오는 책들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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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이즈미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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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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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1년12월8일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전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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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히데키가 이 전쟁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원자탄 세례를 맞을 필요도 없었고, 가미가제를 포함해 수십만 일본인들의 생명을 비참하게 희생시킬 이유도 없었고, 조선을 토해낼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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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도조히데키는 동키호테 같은 만용을 부려 민족을 대량으로 학샐한 원수같은 조상이다. 그래도 일본인 엘리트들은 그런 조상들을 찾아 머리를 조아리고 각오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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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우리를 한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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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이 없던 조선인들에 주권을 만들어 주고, 50평생을 미국에 살고 공부하면서 익힌 민주주의 시스템을 이 땅에 심어준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민족의 원수라고 온갖 욕을 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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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개 국가중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거지의 나라를 180개국 중에서 10등으로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 준 박정희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짓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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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이 고이즈미의 위치에, 서 있다면 도조히데키를 민족의 대학살자라며 무덤까지 파내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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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이즈미와 일본의 반듯한 청년들은 중요한 일을 앞에 둘 때마다 반드시 야스쿠니를 찾아 묵념을 한다고 한다. 감히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한 나라는 일본 밖에 없었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그런 조상들의 기개를 마음에 새기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일본인과 한국인의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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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며, 남한과 북한이 다른 면면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며칠 전 KBS에서는 정관용-진중권이 등장하여 좌익의 주장에 대해 우익들이 '다름'을 인정할 줄 모르고 무조건 욕설부터 해댄다는 말로 우익들을 싸잡아 비난한 바 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의 '다름'은 어째서 인정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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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도조히데키는 미국의 적장이었지 조선의 적장은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먹혀 있었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도조히데키의 자살골 때문에 우리는 어부지리로 독립을 한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도조히데키는 조선독립에 기여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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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에게, 맥아더에게는 1급 전범이었지만 조선의 전범은 확실히 아니었다. 미국이 나서지 않는데 왜 한국이 나서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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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 해도 이게 필자의 역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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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노무현과 반기문은 고이즈미의 신사참배를 향해 욕을 해대고 있다. 바보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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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나 쪼개서 생각해보지 않고, 누군가가 가르쳐준 역사책을 달달외워 가지고, 야수쿠니, 고이즈미라는 단어만 나오면 무조건 욕하는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냉정한 사고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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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부터 해댈 것이 아니라, '설사 못났다 해도 내 조상'이라는 고이즈미의 자세로부터 민족에 대한 긍지가 무엇이고, 민족정신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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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박정희의 묘까지 파내고 싶어하는 빨갱이들, 고이즈미의 조상 섬기는 자세로부터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욕하는 것에 대해 고이즈미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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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진홍 목사님이 공산주의를 해보니...
김진홍 목사님이 이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진짜로 구현해보니, 보통 실망스럽고 답답한 경우를 많이 당하신 모양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자유체제하에서 적법한 절차에의해 시작한 공산주의마져도 이모양일진데, 하물며 증오와 미움으로 시작한 공산주의가 지옥이 않된다면 오히려 기적이랄수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능력을 죽이고 사람의 영혼을 죽이고 사회를 거지같은 지옥사회로 만드는 가장 진보된 형태의 지옥구현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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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 마을에 집단 거주하여 필요에따라 생산하고 필요에따라 분배하는 기독교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구현키위해 온갖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게으름뱅이와 성실한 사람의 일의 효율이 극과 극을 달리는데도 오히려 더욱많은 재화를 소비함으로인해 늘 재화의 부족을 가져왔으며, 이로인해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떠나가고 부담만 되는 사람들만 남아서 효율이 낮은 사회가 되었다는것이 김진홍 목사님의 말씀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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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말이되는 소리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역행하는 그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도 결국은 인간을 해하고 공동체를 헤치게 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또한 절재는 삶의 풍요로움이며 희망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더럽게 여기고 악하게 여기는 그 무엇도 추잡하고 극악무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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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찍어누르는 공산주의는 사람을 살리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패역한 극악무도한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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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당의 붕괴, 지금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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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노무현, 가장 먼저 열우당의 내분상태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모든 책임은 이 노무현에게 있으니 동요하지 말고 굳세게 밀고 나가라' 격려했지만 열우당 사람들은 아예 그런 노무현을 조롱이라도 하듯 그 다음날로 당 지도부의 총사퇴라는 충격파를 만들어 노무현에 안겨주었다. 노무현에 대한 무시오 반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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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처럼 웃는 박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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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는 승리에 도취해 하루 종일 싱글벙글, 표정관리조차 잘 안되는 모양이다. 정말로 한나라당이 좋았다면, 이럴 때 승리에 취한 한나라당에 아낌 없는 축하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 종일 싱글벙글인 박대표가 참으로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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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열우당을 찍을 수 없어 한나라당에 간 표를 가지고 자기가 잘 해서 표를 얻은 줄 알고 저렇듯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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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누구의 덕으로 웃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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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서울역에서, 그제는 시청 앞에서, 그 그제는 프레스센터에서 집회를 열고,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가면서 노무현과 열우당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우익단체들이다. 지난 총선과 금년에 있었던 모든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승리를 안겨준 사람들은 당원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렇게 목 터지고 몸 상하고, 감옥의 담장을 곡예하면서 싸우는 우익단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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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는 국민이 찍었다. 국민은 열우당을 싫어했다. 국민에게 열우당을 싫어하게 만든 사람들, 한나라당인가, 우익단체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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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의원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않았다. 우익단체들이 싸우고 있을 때 골프와 회식을 즐기고, 외국을 유람하며 웰빙 생활로 희희낙락 했다. 한나라당의 무위도식 전성시대, 이제 공짜 점심은 더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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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단체들을 문등병자처럼 멀리하는 한나라당, 어디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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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인가? 한나라당 사람들은 노무현과 열우당의 목줄을 물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우익들을 ‘극우’라며 마치 문등 병에 걸린 사람을 대하듯 한다. 한나라당에 극우가 접근하면 표를 잃으니 멀리 떨어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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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생각하면 때로는 한나라당이 열우당보다 더 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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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봐라! 내가라도 나서서 제대로 된 자유주의 이념 정당을 반드시 만들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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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벼르고 있는 우익들이 한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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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당은 곧 붕괴될 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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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민주당-자민련-충청도에서 생겼다는 무색무취당 등이 모여서 새로운 당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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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박근혜는 송장과 다름없는 열우당을 이긴 것에 파안대소 오늘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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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지리로 얻은 승리요, 우익단체들이 안겨준 승리라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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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엔 정치판 돌아가는 줄기를 읽고, 국제시국을 읽는 눈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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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떻게 하나, 미우나 고우나 한나라당 밖에 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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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판세가 얼마나 더 지속된다고 보는가? 한국사회에 그렇게 사람이 없다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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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단체들은 한나라당을 위해 싸운 게 아니라 공산세력과 싸웠다. 한나라당이 이들과 싸우지 않으면 이들과 싸울 수 있는 정당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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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은 노무현 세력을 공산세력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한나라당은 열우당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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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당과 한나라당에 이념 격차는 없다. 원희룡 같이 '위수김동'을 외치던 자가 최고위원을 하는 당이 한나라당이요, 이명박-손학규 같은 또 다른 공산주의 의증을 가진 세력이 동거하는 열우당 2중대가 바로 한나라당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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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두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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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서적들: 초-중-고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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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만나야 할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글 이혜진, 홍서여, 그림 원혜진, 도서출판 문공사
표지 영상: 알베르트 슈바이처-마틴 루터 깅- 테레사-달라이라마-아웅산 수지-넬슨 만델라선상에 선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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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여행
펴낸곳: 5.18기념재단
보급처: 5.18기념재단
초판: 2005.1.10
글:도래미
그림: 이우진
펴낸이: 박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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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박정희 1권 및 2권 ”
“왜곡된 신화 영웅인가 기회주의자인가”
도서출판: ‘시대의 창’
마포구 서교동 397-2
기획: 민족문화연구소, 뉴스툰
초판: 200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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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도서출판 꿈소담이
지은이: 호원희
200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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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과 김대중”
글: 우리기획
출판사: 예림당(강남구 삼성동153)
200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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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TD><PRE><FONT face=휴먼매직체 color=#000033 size=3><MARQUEE style='LEFT: 140px; POSITION: absolute; TOP: 350px' scrollDelay=100 direction=up behavior=alternate width=700 height=490><MARQUEE scrollDelay=100 behavior=alternate><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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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70년11월13일
노동자로 태어나
인간으로 돌아가다
:<UL><UL>
아아, 저 스물두 해의 아픈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에 온몸을 부딪쳐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br>
지나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br>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br>
1988년 11월 13일, 삼동친목회와 청계피복노조가 일천만
노동자의 뜻을 모아 조영래의 글과 장일순의 글씨로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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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L></UL>
:<EMBED src=http://giannikwon.cafe24.com/songs/kaulbam.wma width=400 height=45 hidden=true type=audio/x-ms-wma autostart='true' volume='0' loop='-1'></FONT></PRE></TD></TR></TBODY></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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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변호사가 좌익이면 그 속편을 쓴 나도 좌익인가?
1970년 11월 19일 장례식 때 세워진 비석이다. ‘기독청년 전태일의 묘, 삼백만 근로자 대표’라는 묘비명 측면과 뒷면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나의 죽엄을 헛되이 하지 말라! 삼백만 근로자의 권익옹호를 위하여 투쟁타가 분신으로 기초석이 되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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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변호사와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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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로 태어나 인간으로 돌아간 전태일
변호사로 태어나 인간으로 돌아간 조영래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나란히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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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조선일보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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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의 한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낯선 도회지의 길거리를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다니며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리야카 뒤밀이로 허기진 밑바닥 삶을 이어오다가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된 그는 거기에서 노동자의 청춘과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는 지옥과 같은 노동현실을 보았다. 허리도 펼 수 없는 비좁은 다락방의 먼지 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본 채 하루 16시간을 기계처럼 혹사 당하는 어린 소녀들의 어두운 눈망울 앞에 절망과 분노로 몸서리치던 그는 뜻있는 재단사들을 삼동친목회로 묶어 작업시간 단축, 건강진단 실시, 임금인상, 다락방 철폐 등 ‘인간 최소한의 요구’를 내세우고 싸우던 끝에 업주들과 경찰의 폭력 앞에 저지당하자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며 스스로 스스로 몸을 불살라 스물두 해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이 폭탄과 같은 죽음이 사람들의 억눌린 가슴가슴을 뒤흔들어 저 숨막히는 분단과 독재의 형틀에 묶여있던 노동운동의 오랜 침묵을 깨뜨렸고 굴종과 패배를 모르는 그의 불타는 넋은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고 이소선 어머니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폭압에 맞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무한한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아아, 저 스물두 해의 아픈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에 온몸을 부딪쳐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지나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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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13일, 삼동친목회와 청계피복노조가 일천만 노동자의 뜻을 모아 조영래의 글과 장일순의 글씨로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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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아버지 전상수는 봉제노동자였다. 그는 집에 재봉틀 한두 대를 놓고 피복제조업을 하거나 삯일을 했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하면서 좌절감이 쌓이자 그는 이를 폭음으로 풀었고 술주정과 화풀이는 고스란히 아내와 자식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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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전태일이 여섯 살 되던 해. 그때까지 부산에서 소규모 양복제조업을 하고 있던 전상수는 염색공장에 맡긴 원단이 오랜 장마를 만나 상해버리는 바람에 재기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는다. 그는 무작정 솔가해 서울로 온다. 일자리를 잡지 못한 그는 평화시장, 중부시장 등을 떠돌아다녔다. 사실상 실업자와 같은 생활이 2년여 이어졌다.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서울 거리를 헤매는 동안 아내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서울역 근처에서 노숙, 동냥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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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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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국민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전태일은 여덟 살 때 남대문 초등공민학교 2학년에 편입, 처음으로 학교생활을 한다. 전태일은 남대문 초등공민학교에서 남대문 국민학교로 편입시험을 치러 합격한다. 잠시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또다시 사기를 당하면서 일가는 거리로 내몰렸고, 열두 살의 전태일은 소년가장이 되어야 했다. 결국 4학년 초에 학교를 중퇴한다. 1년여의 가출을 끝낸 전태일은 대구에서 가족과 만나 다시 안정된 생활을 한다. 1963년 초, 그는 대구의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잊을 수 없는 학교생활을 한다. 1년도 못되는 학창시절을 전태일은 수기에서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이라고 썼다. 학교공부는 그게 끝이었다. 아버지는 또다시 술을 마셨고 집안에서는 구타와 고함과 울음이 끊이질 않았다. 절대빈곤과 가정 폭력 속에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가 평화시장의 임금노동자가 된 것은 1965년 가을이었다. 학생복 맞춤집의 ‘시다 구함’ 광고를 보고 찾아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한다. 그러나 ‘기술을 배워 어머니, 아버지를 편히 모시겠다’던 전태일은 소망을 키워보기도 전에 평화시장의 지옥과 같은 처참한 노동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시다 여공들은 스스로의 젊음과 소망과 건강과 생명을 그날그날 갉아먹으며 살아야 하는 매혈(賣血) 인생이라고 전태일은 생각했다.
전태일은 이때 피땀 흘린 대가를 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해 억울함을 느낀다. 1966년 말, 그는 미싱사를 그만두고 재단사를 택한다. ‘전태일 평전’은 이 대목을 이렇게 쓰고 있다. ‘2년여 고통의 기간을 거쳐 눈앞에 보이는 불의한 기업주의 횡포를 명료하게 목격하였을 때, 그는 가족에게 돈 몇 푼을 다달이 더 보태려고 고분고분 죽어지내는 것보다는 이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여 무언가 싸움에 나서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은 재단사로서 어린 여공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그가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값을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곤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떼어놓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왈칵 토해냈다. 처녀는 폐결핵 3기로 판명되었고 해고당했다. 이 사건은 전태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다.
1968년 전태일은 아버지로부터 ‘노동법이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구입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 때부터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를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만드는 준비를 한다. 1969년 쌍문동의 전태일 집에서 ‘바보회’가 만들어진다. 평화시장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모임이었다. 그는 재단사 일을 하는 틈틈이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 내용을 알려주며 현재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일깨워주었다. 이때부터 전태일은 사업주들에게 위험한 인물로 경계 대상이 되었고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을 떠나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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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9월, 평화시장에 다시 나타난 전태일은 바보회보다 한 단계 진전된 삼동친목회를 만든다. 삼동친목회를 통해 평화시장의 실태를 조사해 노동청에 진정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신문기자를 만나 사정을 설명했고 마침내 평화시장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문에 나자 사업주와 관계기관은 대화에 응했고 그럴 듯한 말로 많은 약속을 한다. 그러나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전태일은 10월 20일 노동청 앞에서 시위를 하기로 한다. 하지만 근로감독관의 설득에 데모 계획은 연기되고, 또 연기되었다.
결국 삼동회원들은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한다. 11월 13일 오후 1시, 전투경찰은 평화시장을 에워쌌고 사업자들은 노동자들이 현장에 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때 전태일이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나타나 친구에게 성냥을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온몸에 불이 붙은 전태일은 평화시장 앞길을 내달리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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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리곤 쓰러졌다. 삼동회원들은 불을 끄려 달려들었다. 순간 다시 벌떡 일어난 전태일이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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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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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사후 35년, 평화시장의 오늘미싱 소리와 함께 생존의 싸움도 여전 봉제공장, 수입품에 밀려 일감 줄어들고 근로조건도 점점 뒷걸음질‘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창신동.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주택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드르륵, 드르륵’ 하는 미싱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겉에서 보기엔 평범한 주택건물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미싱이 돌아가는 소규모 봉제공장이다. 대부분 10평 미만의 공장에 3~4명이 미싱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 입구에는 ‘객공·하청 구함’ ‘미싱사·시다 구함’ 등과 같은 구인광고가 연락처와 함께 붙어있다.
▲ 1960~1970년대 평화시장 다락방 공장의 모습.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에는 더이상 피복공장이 남아있지 않다. 공장은 대부분 동대문을 중심으로 근방 1.5㎞ 지역에 위치한 창신동, 신당동, 숭인동 일대 주택가로 들어갔다. 현재 창신동에서 숭인동에 걸쳐 있는 공장 수만 3000개 정도로 추산된다. ‘사단법인 동대문의류봉제협회’는 이 중 70% 이상이 5인 이하의 영세업체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근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만들어진 수입의류가 전체 의류시장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일감이 줄어들자 10인 이상의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은 정상 가동이 어렵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대규모 공장 대신 집에 미싱기계를 들여놓고 시다만 고용해 일감을 떼어다 작업하는 영세업체들이 늘고 있다.
일감이 안정적으로 들어오지 않다보니 일이 몰릴 때는 1970년대처럼 하루 14시간 이상씩도 일할 때가 있다. 협회에 따르면 수입품과의 가격경쟁으로 납품가가 5년 전 수준으로 하락해 현재 청바지 한 벌을 납품하고 받는 돈은 3000원 정도다. 1년 동안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된다고 할 때 현재 시다의 월급은 한 달에 110만원 내외, 미싱사의 경우 150만~180만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감 부족으로 1년에 서너 달 정도는 공장이 멈추곤 한다.
최근 2~3년 전부터 이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중요한 변화는 하청과 객공(客工)의 증가다. 객공이란 업주가 미싱사에게 기계와 장소를 빌려주고 미싱사는 옷을 만드는 수량에 따라 공임을 받아가는 제도를 말한다. 전태일이 일하던 1966~1970년 당시 미싱사들은 업주에게 객공 방식으로 공임을 받아갔다. 옷을 더 많이 만들수록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미싱사들은 자신의 건강은 아랑곳않고 과도하게 업무에 매달렸다. 일이 많을 때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일이 아예 없을 때는 한 푼도 받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제도는 당시 청계천 노동자의 생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구조적 병폐로 꼽혔다. 결국 1976년 청계피복노조는 단체협약을 통해 객공 미싱사들이 일감이 없을 때도 기본급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그런데 최근 일감이 줄어들면서 객공을 통해서라도 생계를 이어가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객공을 할 경우 업주와 미싱사의 분배비율은 보통 4:6이다.
▲ 2005년 동대문구 창신동의 한 봉제공장 내부.
기술자들의 노령화도 커다란 문제다. 현재 업계는 이곳에서 일하는 미싱사들의 평균 연령이 40세 이상인 것으로 추정한다. 시다에서 시작해 미싱사가 되기까지 보통 6년 정도 걸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약 10~15년 전부터 젊은 신규인력의 유입이 사실상 중단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동안은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다 시다로 써왔는데 당국의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인해 이마저도 어려워지고 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젊은 시절부터 줄곧 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전업을 생각할 수도 없다. 창신동의 봉제공장에서 15년째 일하고 있는 김모(34)씨는 “젊었을 때는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대문 의류봉제협회’의 차경남 전무이사는 “국내 농산물 수입액이 5억달러 수준인데 반해 의류 수입액은 28억달러에 이른다”며 “이 같은 추세로 가면 앞으로 3년 내에 국내 의류제조업체의 70% 정도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조업자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노동시간 준수와 같은 근로기준법을 있는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서울의류업노동조합’의 김정호 위원장은 “사장이 함께 일을 하며 2명, 3명을 고용하는 영세업체라 하더라도 임금을 체불하거나 떼어먹는 등의 근로기준법 위반사례가 발생하는 것을 좌시할 순 없다”며 “다만 시다 1명을 고용해서 집에서 일감을 떼어다 일하는 식의 가내수공업 같은 경우 근로기준법의 적용이 어렵다면 이에 대한 관련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br>
(이상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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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속편/부제/조영래 변호사에게 바치는 헌정사>
글쓴이 김용순(내용 별첨)
.....................................................................................................
시스템 클럽 지만원 대표가 전 월간 조선 조갑제 사장과
서정갑 (예)대령(rotc연대2기) 휘하에 두고 지향하는 사회는 이렇다
<br>
(1)“좌익이 쓴 전태일 이야기”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겉만 번드르하게 도색-미화한 것이고, 실상은 농촌을 더 못살게 한 것이었다”
<br>
“1969년,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재단 일을 하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늘 끼고 다니면서 노동법을 공부했다.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고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기계취급을 받아 왔다’고 노동자들을 일깨웠다.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대로 일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자고 설득했다.”
<br>
“전태일 열사는 쌍문동, 도봉산 기슭에 있는 판잣집에 살았다. 1970년11월12일 아침,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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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내일은 좀 심상치가 않습니다.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구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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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 앞, 현수막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시위대 옆 골목에서 불길로 온 몸에 불길을 뒤집어 쓴 사람이 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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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바로 전태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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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2”의 195쪽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 편지 5”의 203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두 책에 묘사 돼 있는 전태일이 대동소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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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들을 읽으면 누가 봐도 좌익 진영이 쓴 글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전태일을 영웅으로 묘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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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의 글에서 자가당착이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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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만일 자기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화살이 되려 했다면 어머니에게 오후 한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아들이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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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휘발유를 뿌리고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까지는 이미 노동세력과 사전에 기획돼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어머니 더러 나와서 ‘구경하라’고 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누군가가 골목에서 불을 지르고 강제로 내보냈을 것이라는 게 제 추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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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 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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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불을 붙이려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성냥불을 그어댔을 것입니다. 옆 골목에서 이미 불화살이 되어 나온 전태일, 그 불을 전태일이 붙였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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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전태일처럼 불화살이 된 노동자 17명 중에는 ‘장엄한 공경만 연기하라’고 속여 놓고는 여러 사람들이 바람을 잡는 틈을 이용하여 누군가가 성냥불을 그어댄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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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970년에 평화시장에 있었던 재봉 일은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가장 안전하고 편한 직종에 속했습니다. 1990년까지도 구리시에는 원진레이온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일 한 사람들은 뼈가 녹고 살이 썩었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또 어땠습니까? 고엽제는 또 어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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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좌익들은 만화와 동화식으로 역사를 왜곡하여 학교 도서관에 마구 뿌립니다. 그런데 우익에서는 나오는 책들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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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이즈미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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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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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1년12월8일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전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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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히데키가 이 전쟁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원자탄 세례를 맞을 필요도 없었고, 가미가제를 포함해 수십만 일본인들의 생명을 비참하게 희생시킬 이유도 없었고, 조선을 토해낼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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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도조히데키는 동키호테 같은 만용을 부려 민족을 대량으로 학샐한 원수같은 조상이다. 그래도 일본인 엘리트들은 그런 조상들을 찾아 머리를 조아리고 각오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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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우리를 한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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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이 없던 조선인들에 주권을 만들어 주고, 50평생을 미국에 살고 공부하면서 익힌 민주주의 시스템을 이 땅에 심어준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민족의 원수라고 온갖 욕을 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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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개 국가중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거지의 나라를 180개국 중에서 10등으로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 준 박정희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짓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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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이 고이즈미의 위치에, 서 있다면 도조히데키를 민족의 대학살자라며 무덤까지 파내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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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이즈미와 일본의 반듯한 청년들은 중요한 일을 앞에 둘 때마다 반드시 야스쿠니를 찾아 묵념을 한다고 한다. 감히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한 나라는 일본 밖에 없었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그런 조상들의 기개를 마음에 새기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일본인과 한국인의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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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며, 남한과 북한이 다른 면면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며칠 전 KBS에서는 정관용-진중권이 등장하여 좌익의 주장에 대해 우익들이 '다름'을 인정할 줄 모르고 무조건 욕설부터 해댄다는 말로 우익들을 싸잡아 비난한 바 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의 '다름'은 어째서 인정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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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도조히데키는 미국의 적장이었지 조선의 적장은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먹혀 있었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도조히데키의 자살골 때문에 우리는 어부지리로 독립을 한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도조히데키는 조선독립에 기여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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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에게, 맥아더에게는 1급 전범이었지만 조선의 전범은 확실히 아니었다. 미국이 나서지 않는데 왜 한국이 나서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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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 해도 이게 필자의 역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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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노무현과 반기문은 고이즈미의 신사참배를 향해 욕을 해대고 있다. 바보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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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나 쪼개서 생각해보지 않고, 누군가가 가르쳐준 역사책을 달달외워 가지고, 야수쿠니, 고이즈미라는 단어만 나오면 무조건 욕하는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냉정한 사고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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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부터 해댈 것이 아니라, '설사 못났다 해도 내 조상'이라는 고이즈미의 자세로부터 민족에 대한 긍지가 무엇이고, 민족정신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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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박정희의 묘까지 파내고 싶어하는 빨갱이들, 고이즈미의 조상 섬기는 자세로부터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욕하는 것에 대해 고이즈미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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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진홍 목사님이 공산주의를 해보니...
김진홍 목사님이 이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진짜로 구현해보니, 보통 실망스럽고 답답한 경우를 많이 당하신 모양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자유체제하에서 적법한 절차에의해 시작한 공산주의마져도 이모양일진데, 하물며 증오와 미움으로 시작한 공산주의가 지옥이 않된다면 오히려 기적이랄수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능력을 죽이고 사람의 영혼을 죽이고 사회를 거지같은 지옥사회로 만드는 가장 진보된 형태의 지옥구현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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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 마을에 집단 거주하여 필요에따라 생산하고 필요에따라 분배하는 기독교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구현키위해 온갖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게으름뱅이와 성실한 사람의 일의 효율이 극과 극을 달리는데도 오히려 더욱많은 재화를 소비함으로인해 늘 재화의 부족을 가져왔으며, 이로인해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떠나가고 부담만 되는 사람들만 남아서 효율이 낮은 사회가 되었다는것이 김진홍 목사님의 말씀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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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말이되는 소리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역행하는 그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도 결국은 인간을 해하고 공동체를 헤치게 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또한 절재는 삶의 풍요로움이며 희망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더럽게 여기고 악하게 여기는 그 무엇도 추잡하고 극악무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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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찍어누르는 공산주의는 사람을 살리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패역한 극악무도한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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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당의 붕괴, 지금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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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노무현, 가장 먼저 열우당의 내분상태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모든 책임은 이 노무현에게 있으니 동요하지 말고 굳세게 밀고 나가라' 격려했지만 열우당 사람들은 아예 그런 노무현을 조롱이라도 하듯 그 다음날로 당 지도부의 총사퇴라는 충격파를 만들어 노무현에 안겨주었다. 노무현에 대한 무시오 반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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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처럼 웃는 박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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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는 승리에 도취해 하루 종일 싱글벙글, 표정관리조차 잘 안되는 모양이다. 정말로 한나라당이 좋았다면, 이럴 때 승리에 취한 한나라당에 아낌 없는 축하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 종일 싱글벙글인 박대표가 참으로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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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열우당을 찍을 수 없어 한나라당에 간 표를 가지고 자기가 잘 해서 표를 얻은 줄 알고 저렇듯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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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누구의 덕으로 웃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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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서울역에서, 그제는 시청 앞에서, 그 그제는 프레스센터에서 집회를 열고,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가면서 노무현과 열우당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우익단체들이다. 지난 총선과 금년에 있었던 모든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승리를 안겨준 사람들은 당원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렇게 목 터지고 몸 상하고, 감옥의 담장을 곡예하면서 싸우는 우익단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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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는 국민이 찍었다. 국민은 열우당을 싫어했다. 국민에게 열우당을 싫어하게 만든 사람들, 한나라당인가, 우익단체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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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의원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않았다. 우익단체들이 싸우고 있을 때 골프와 회식을 즐기고, 외국을 유람하며 웰빙 생활로 희희낙락 했다. 한나라당의 무위도식 전성시대, 이제 공짜 점심은 더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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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단체들을 문등병자처럼 멀리하는 한나라당, 어디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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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인가? 한나라당 사람들은 노무현과 열우당의 목줄을 물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우익들을 ‘극우’라며 마치 문등 병에 걸린 사람을 대하듯 한다. 한나라당에 극우가 접근하면 표를 잃으니 멀리 떨어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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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생각하면 때로는 한나라당이 열우당보다 더 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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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봐라! 내가라도 나서서 제대로 된 자유주의 이념 정당을 반드시 만들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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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벼르고 있는 우익들이 한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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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당은 곧 붕괴될 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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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민주당-자민련-충청도에서 생겼다는 무색무취당 등이 모여서 새로운 당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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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박근혜는 송장과 다름없는 열우당을 이긴 것에 파안대소 오늘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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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지리로 얻은 승리요, 우익단체들이 안겨준 승리라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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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엔 정치판 돌아가는 줄기를 읽고, 국제시국을 읽는 눈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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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떻게 하나, 미우나 고우나 한나라당 밖에 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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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판세가 얼마나 더 지속된다고 보는가? 한국사회에 그렇게 사람이 없다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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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단체들은 한나라당을 위해 싸운 게 아니라 공산세력과 싸웠다. 한나라당이 이들과 싸우지 않으면 이들과 싸울 수 있는 정당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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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은 노무현 세력을 공산세력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한나라당은 열우당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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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당과 한나라당에 이념 격차는 없다. 원희룡 같이 '위수김동'을 외치던 자가 최고위원을 하는 당이 한나라당이요, 이명박-손학규 같은 또 다른 공산주의 의증을 가진 세력이 동거하는 열우당 2중대가 바로 한나라당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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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두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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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서적들: 초-중-고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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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만나야 할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글 이혜진, 홍서여, 그림 원혜진, 도서출판 문공사
표지 영상: 알베르트 슈바이처-마틴 루터 깅- 테레사-달라이라마-아웅산 수지-넬슨 만델라선상에 선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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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여행
펴낸곳: 5.18기념재단
보급처: 5.18기념재단
초판: 2005.1.10
글:도래미
그림: 이우진
펴낸이: 박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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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박정희 1권 및 2권 ”
“왜곡된 신화 영웅인가 기회주의자인가”
도서출판: ‘시대의 창’
마포구 서교동 397-2
기획: 민족문화연구소, 뉴스툰
초판: 200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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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도서출판 꿈소담이
지은이: 호원희
200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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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과 김대중”
글: 우리기획
출판사: 예림당(강남구 삼성동153)
2000.12.10
댓글 2개
사색을 아끼는 사람
2005. 11. 25. 오전 12:00
이런 무게 있는 글은 게시판에 올려야 많은 사람이 볼 것 같은데요.
운영자
2005. 11. 25. 오전 12:00
김용순님 이런 정치성의 글은 이곳과 맞지 않을뿐더러 더구나 작가의글 란에는 더더욱 아닙니다. 굳이 쓰시겠다면 자유게시판으로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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