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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
비상소집 된 각 부서장과 과장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 이었다. 가동률에 목을 매던 공장이 갑자기 ‘감량생산’이라니 그럴 법도 했다.
류과장은 마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 짧은 시간동안 어느새 회의 자료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류과장은 마이크를 잡고 스크린에 현재의 상황을 빔프로젝트로 비춰가며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북미와 유럽에서 판매된 뷰젤은 모두 12만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시장 점유율에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올 년말 까지 30만대 가량의 수출목표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방호스의 부품내구성 부실로 올 해 초 적용된 부품번호 T081 연료연결 호스로 인하여 전부 리콜판정이 남으로써 생산의 감량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공정기술에서 마련된 보고서를 보시면 1차적으로 라인의 UPH를 92에서 60으로 떨어뜨리고 잔업을 없앨 예정입니다. 주 5일 근무를 단행하고 보름간 라인 운영이후 상황이 극단적으로 돌아가면 2교대를 없애고 격일근무를 할 예정입니다.”
회의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질문했다.
“사무직은 어떻게 됩니까?”
“정상입니다. 지난번처럼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밴다는 어떻게 됩니까?”
물류과 박과장 이었다.
“납입지시 물량은 내일 전산으로 재조정 되어 각 회사로 보내집니다.”
“노조가 격일근무를 받아드릴까요?”
노무부 정과장이 물었다.
류과장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일량이 없으면 일을 못하고, No work no pay는 기본입니다. 만일 이번일로 단체행동을 하면 단체행동을 주동한 순서대로 감원의 일차대상이 되도록 노무부에서는 각별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회의랄 것도 없이 거의 일방적으로 류과장이 만든 자료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회의 자료를 들고 신상무실로 향했다. 여비서가 손님이 계신다고 했다. 회의 자료를 두고 나오면서 손님이 나오시는 대로 자료를 드리라고 부탁했다.
긴박했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장은 조용했다. 모처럼 잔업이 없어져서 쉬는 시간에는 퇴근 이후 삼삼오오 자리를 마련하는 분위기가 오히려 삭막한 현장에 생동감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찾아온 여유를 어떻게 쓸까 고민이 되었다.
조퇴를 하는 것 같은 어색한 느낌으로 정문을 나서자 공장 앞의 점포들은 때 아닌 호황에 대한자동차 유니폼으로 북적거렸다. 시간이 조금 비어서 그동안 등한시 해왔던 최신 경제 관련 서적을 고르기 위해 서점에 들렀다. 서점에도 역시 우리 직원들로 붐볐는데 전산과의 서차장이 컴퓨터관련 서적이 진열되어 있는 책꽂이 앞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해에 한달 늦게 입사한 덕에 나를 선배라고 불렀다.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반가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병이야, 하루라도 신간서적의 동향을 직접 파악해야 안심이 되는 거야?”
“선배, 오늘 뷰젤공장 회식하나 보지. 형편 좋네. 그런데 귀에 꽂은 건 뭐야?”
“응, 이거 현장에 긴급사항 발생하면 바로 연결해주는 무선 이어폰이야. 나중에 책임자를 관리하기위해서 주요 관리실마다 녹음이 되도록 되어있지. 한 달 간 저장이 가능해.”
“말로만 듣던 현장 자체 방송 제어기구만.”
“소집시간까지 조금 남았는데, 시간 되면 맥주라도 한잔 하고 가지.”
“그러지 뭐. 마침 고르던 책이 없어서 집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나는 서차장을 데리고 약속장소로 미리 가서 예약된 옆방에 자리를 잡았다.
서차장의 무덤덤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 전산에러 말야. 이해가 잘 안 되거든.”
“선배, 사실 그거 방어벽이 뚫린 거야. 내부적인 문제로 끝내려고 쉬쉬하는 거지. 전산요원 다 잘리는 내용이야. 해킹 당했어. 그것도 중학생 녀석에게. 처벌할 수가 없지. 고소하면 우리가 뚫렸다는 걸 인정하는 거니까. 오랫동안 괴롭혀왔어. 막으면 뚫고 더 겹겹으로 막으면 더 간단하게 뚫어버리니까. 저 놈을 붙잡아다가 우리 전산요원 시키고 싶을 정도라니까.”
“그런데 라인에다가 영향을 주면 법적으로 강력하게 응징을 해야 되지 않어?”
“그런데 그게 도장공장은 그 애 문제가 아니라 방어벽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부 쓰레기들이 프로그램 도는 동안 하나씩 튀어나와서 그래. 그게 미세한 데이터를 건드려서 오작동이 나오는데 완전히 소멸시키려면 앞으로 두 달 정도는 더 돌려봐야 될 거야.”
“그렇다면 라인은 항상 긴장해야 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뭐. 그리고 이 내용은 오프더레코드야. 선배 믿고 말한 거니까 아무에게도 얘기하면 안 돼. 알았지!”
간이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예약되어있던 옆방에서 대화가 들려왔다.
신상무의 껄쭉한 목소리로 들렸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함께 사직서를 내는 거야.”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자의 목소리는 류용찬 과장의 그것이었다.
전혀 예상 밖의 대화에 귀를 쫑긋하고 벽에다 귀를 갖다대었다.
서차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송호길 차장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겠지?”
“그분은 일밖에 모르시잖아요.”
“좌우간 그 친구 일하나는 열심히 해. 대가리는 영 안돌아가면서. 모두 자네가 있으니까 저러고 있는 거지 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사람이 요령이 있어야지. 우리가 이번에 옮기는 자리는 국내 최고 그룹이 신생 월드자동차를 만드는 핵심부서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최고의 조건이 될 거야. 자네는 생산관리부장이 될 거고. 아까 저쪽에서 다녀갔는데 자네에 대해서 관심이 아주 많아.”
“감사합니다. 대한자동차와 정이 많이 들었는데.”
“동방호스가 적절히 역할을 잘 해 줬고. 아마 월드자동차의 주요 공급원이 될 거야. 이정도만 해놓고 노조를 부채질하면 당분간 대한은 어려워질 거야.”
“전산도 이미 구멍이 난 상태입니다. 제가 우리 아들의 아이디로 접근해보면 항상 허술하죠. 김대리와 정과장은 매번 방어벽을 쌓아보지만 애들이 너무 단순해요. 오늘 도장공장은 심심풀이로 조금만 손댄 겁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댓글 5개
글이란 상상력만으로는 쓸 수 없지요. 어쩌면 이리도 소상히 글의 전개가 이루어 질까요. 부럽습니다.
포아풀님 감사합니다.
끝인가요? 인생살이 정말 알 수 없네요. 머리싸움..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이런 불온한 결탁으로 많은 이들이 헛되이 희생된다면 어찌 살겠는지요...저 같으면 꼭지가 돌아가 버릴 것 같네요. 물고 물리고 언제까지나 인생은 그렇게 끊임없이 약삭빠른 강자의 몫으로 돌아가려나...허탈합니다. 희망있는 결말은 안될까요? 한민님^^*
아직 2회분이 남았는데요. 서둘러 올리겠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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