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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의 말을 듣다

포아풀 2008. 04. 27. 오후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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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얹어 준 일꾼들 새참을 이고
언덕 넘어가던 그날은
폐병 들었다던 아랫마을 여자의 노란 얼굴이
아지랑이로 아른대는 봄날 이었다
그 여자가 핏기 없는 손으로 내밀어 주던 과자
덥석 받지 못하게 어른들은 눈짓으로 나를 숨게 했고
그녀의 참한 얼굴에 드리운 창백함이
더할 수 없이 나를 흔들리게 했었다
그 먼 기억 돋으며
아찔한 걸음사이로 먼지 뽀얗게 올라왔고
점점 자라목으로 움츠러들었다
새참을 내려놓기라도 하면
다시 올릴 힘 없을 것 같았지만
비틀대는 걸음은 어느새 지나던 옆 무덤가에
나를 풀썩 주저 앉혔고
까닭모를 서러움에 기어이 꺽꺽 울고 말았다
적막한 봄날의 울음소리 메아리로 돌아와
작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아가 우지마라, 어서 그치지 않으련
누군가의 속삭임에 눈물 쓰윽 훔치고
잦아드는 울음 주어 담는데
아, 발치에 잡히는 그 무엇
솜털 안개로 덮은 할미꽃 곱수그린 채
혀 끌끌 차고 있었다
무릎 꿇고 엎드린 채 그 꽃 올려다보는데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기운이 나를 에워싸며
훅, 살냄새 끼쳐오고
붉은 자줏빛 입술연지 애써 바른 듯한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묻어왔다
넋 놓고 있던 나는 내려놓은 새참 있는 힘껏 들어
머리에 얹었다
타박타박 몇 발자국 짚다가 흘끔 돌아다본 거기,
그 여자 여전히 어깨 곱수그린 채 오두마니 앉아있었다
봄바람이 한차례 무덤에 배를 밀고 지나갔지만
그 꽃이 깔고 앉은 무덤가 유난히 따스해 보였다

댓글 12개

김문숙 2008. 04. 27. 오후 06:14

피난시절 끝날 무렵 임학한 초등학교는 작은 동산을 몇개 넘어야 했읍니다. 높은 학년 언니 때문에 읽기 쓰기,빼기 더하기 다 익혀 갔으니 넌 교실에 있을 필요 없어 마음껏 나가 놀라고 남돌보다 일찍 나온 텅빈 운동장, 그건 상이 아니라 벌일 수도 있었지요. 다행스럽게 뒷 산 무덤가에 핀 할미꽃이 언제나 바람 슬쩍 지나간 뒤에 빨간 입술을 드려 내어 웃어 주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게다가 작은 언덕들은 무덤이 많았어요. 오가는 길에 보는 정다운 할미꽃 그건 눈여겨 본 그곳에 늘 약속처럼 앉아 있었어요. 저는 그에게 말했어요. 내가 똑똑한 게 아니야. 재들은 아직 기회가 없었을 뿐이야 하고.친구들 칭찬을 하면 늘 얌전히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어요. 포아폴님이 만난 할미꽃도 참 아름답군요.

유민자 2008. 04. 27. 오후 07:42

\" 타박타박 걷다가 힐끔 돌아본 거기...\" 오늘은 최시인님 생의 시선을 끌어올리는 \"유난히 따사로운\" 시심의 매력을 느낍니다. 전 포아폴님을 따라 흉내내기 한 번 해보려해요. 혹시! 그 감성의 행보, 저를 따라 졸랑거리며 웃어줄런지요? 저는 그 할미꽃의 평온이 제게로 다가서는 소리에 귀 기울여요.

포아풀 2008. 04. 28. 오전 10:51

'시는 체험이다'라고 릴케는 말했다지요. 시를 발표할 때마다 질문을 받지요. 시 속 사연의 주인공은 누구냐고... 그러면 난감할 때가 있지요. 딱히 이거다,라고 말씀드리지 못하는 부분들... 직접, 간접의 체험일 수도 있고 상상력이 보태진 경우도 있고... 그러나 완전히 상상만으로는 진정 글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을... 무덤가의 그 할미꽃, 그녀가 건넨 말이 아직도 귓전에서 맴돌아요. 김문숙 시인님, 유년의 어느날 할미꽃에게 전하셨던 말, 그 말을 제가 슬며시 엿들어요. 유민자 수필가님, 할미꽃의 평온이 다가서는 소리, 느껴지시나요? 두 분 말씀, 감사합니다.

손일갑 2008. 04. 28. 오후 02:07

봄날이 폐병든 여자의 노란얼굴 참말 슬프네요 슬프요 안녕하세요 포아풀님 무덤의 배를 밀어내는 봄바람의 향기는 참말 이승같지않네요 이승같지않네요 포아풀님의 시를 읽고있으면 저가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뭘까요 뭘까요 감사합니다

포아풀 2008. 04. 29. 오전 09:39

어줍잖은 글로 마음을 어지럽혀드렸나요. 늘 귀한 흔적 감사합니다. 대구에 사신다구요.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늘 까까운 분입니다.

봄 2008. 04. 29. 오전 10:49

할미

김문숙 2008. 04. 29. 오후 03:03

봄님은 많고 많은 봄 중에서 가장 이른 봄이 아니실런지? 분노와 열음, 나눔과 희망의 대 전제 안에서 힘찬 역동을 가지신.

손일갑 2008. 04. 29. 오후 03:09

고맙습니다 예 대구에서는 사색의 향기의 가족은 없습니까 대구에 모임이있으면 포아풀님께서 가르쳐 주시면 감사합니다

하늘스케치 2008. 04. 29. 오후 07:55

왜 할미꽃은 무덤가에만 필까요? 어릴적 외할머니 산소에 갔다가 피어있던 자줏빛 할미꽃을 보았지요. 하도 예뻐서 꺾을려고 했더니 엄마가 그건 할머니의 영혼이라며 못꺾게 했어요. 그다음부터 할미꽃만 보면 외할머니가 생각나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까닭모를 따스함이 흘러나와 저절로 미소짓게 되던군요. 외할머니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요... 뵙고 싶네요^^ 포아풀님, 안녕하시지요? 정말 뵌지 오래되었네요. 지난번 문학기행때는 뵐수 있을까 기대했었는데... 다른 행사가 있으셨다구요. 이번 기행때는 기대해도 될까요? 살포시 웃음짓는 온화한 그 미소가 정말 그립네요.*^^*

포아풀 2008. 04. 30. 오전 09:19

오묘한 빛으로 유혹하는 꽃들의 앞모습보다는 그 꽃을 피우기까지의 힘든 과정을 생각하는, 타인의 삶에도 눈물겨운 사연과 아픔이 있다는 것을 끝없이 되묻고 그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려는 예지적인 혜안을 가지신 분, 봄님!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지만 해석이 시를 앞질러 저만큼의 높이로 띄워놓으십니다. 자기 감상이나 연민의 차원으로 추락시키지 않으려는 깊은 배려를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손일갑님, 대구의 모임은 잘 모르겠어요. 오프라인 모임은 모르지만, 얼굴은 뵐 수 없지만, 이곳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시면... 좋은 글로 자주 뵙겠습니다. 그래요, 하늘스케치님. 할미꽃은 유난히 무덤가에 많이 피지요. 그곳은 양지바르고 안온한 느낌을 주기 때문인가요 그래서 더욱 처연한 느낌으로 다가오지요. 하늘스케치님, 시원스레 큰 눈에 환한 웃음이 잘 어울리는 분! 다음에는 꼭 뵈어야지요. 감사합니다.

박은정 2008. 04. 30. 오후 04:42

무덤가에 수줍은 듯이 살짝 피어 있던 할미꽃을 잊을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할미꽃의 수줍은 모습이 포아풀님을 많이 닮은것 같은데... 문학기행때 뵙지 못해서 그런지 자꾸만 더 보고 싶어지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포아풀 2008. 05. 01. 오전 12:40

행복하네요. 박간사님이 보고싶다하시니 정말로...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요. 요즘 며칠째 우울하던 중이랍니다.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군요. 한 일주일간 숙제 끝내고 훌훌 털고 뵐게요, 간사님. 그늘 없는 간사님이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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