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기행(奇行) #3 노래박사 또래친구
노래박사 또래친구
해맑은 웃음으로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은 생각만으로도 미소 짓게 만들고 가슴을 뿌듯하게 하는 아름다운 기억을 모아서 쌓아둔 곳이다. 큼직한 떡갈나무의 광활한 꿈을 갖게 하였고, 한 아름 가득하게 키운 준 곳이기도 하다. 벗은 두 번째의 나라 했다. 내 안에다 소담스럽게 잘 가꿔 논 어린 시절의 꿈동산은 그 벗이 있어 더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하다. 살포시 눈을 감아본다. 함초롬히 다듬은 기억의 보물 창고가 사붓이 다가온다. 여름날 매미를 잡겠다고 또래와 둘이 아름드리나무에 올랐다가 둘 다 미끄러져 며칠 동안 일어나지도 못 할 정도로 크게 다쳤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개울에서 발가벗고 물장구를 치면서 놀다가 작은 돌 속에 숨어있던 가재 한 마리를 잡고는 서로가 그렇게 신기해했던,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을 법한 추억도 어렴풋이 보인다. 가을에는 메뚜기를 잡는다고 벼가 다자란 논 한 가운데서 논 주인과 숨바꼭질을 하였던 개구쟁이의 못된 장난도 보물창고의 한쪽을 차지하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썰매를 타려고 한 겨울의 매서운 바람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차례를 기다리며 즐겁게 재잘거리던 모습이 훤하게 떠올리려진다. 멈춰진 과거의 시간 속에 서있는 자신을 몰래 들여다보는 것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일이다. 세상의 어떠한 유쾌함이 이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찌 세상일에 한 가지만 있을 수 있겠는가. 잊을 수 없는 슬픔과 견딜 수 없는 아픔도 추억에는 담겨있다. 정(情)이 있으면 인연이 생기고, 그 정(情)이 다하면 인연마저 끊어진다고 하였는가? 불타는 정든 교실 향해 울부짖다 시커멓게 멍이 든 한쪽과 싸우면서 정 붙은 어릴 적 친구를 잃고 반쪽마저 뻥 뚫린 메어지는 가슴으로 청마(靑馬, 유치환)가 살점을 도려내며 삭인 정진연단(情盡緣斷)의 아픔을 되씹어 본다. 「광야에 와서」,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이 사람도 나도 접어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人生)을 버려도 좋으련만/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 이 또한 추억의 한 귀퉁이를 궤고 있는 나의 지난날이다. 우리가 저녁이 되면 매일의 황혼(黃昏)과 작별하지만 내일의 새벽은 오늘의 황혼과 헤어졌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찾지 못한다. 우리는 예정된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야 하는 인생의 나그네이다. 모든 것이, 설령 대지가 잠들 때도 우리는 쉬지 않고 길을 간다. 언제나 전진하며 새로운 하루를 만들고, 그 하루인 오늘을 어제에 더하고, 우리의 기억은 추억이란 명찰을 붙여 깔끔이 봉인된다. 지난날을 회상한다는 것은 그렇게 봉인된 우리의 기억을 뜯어내 그 옛날에 기록되어 있었던 나를 다시 찾아보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고이 감춰두었던 추억의 보물창고를 여는 것은 다발로 엮인 과거의 두루마리를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 가면서 좋은 방향으로 일일이 갈무리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지난 추억을 더듬다보면,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나 지나치지 말았어야 옳았던 일이나 앙금을 남겼던 일도 많다. 기억하기조차도 망설여지는 두려움과 괴로움에 지쳤던 일도 수없이 쌓여있다. 그렇다고 가리고 버릴 수 있는 나쁜 추억이 있겠는가? 모두 다 간직하고 살아야지. 우리가 보는 것은 현상(現象)이다. 그곳에는 크고 작고와 있고 없고의 차별이나 분별이 있다. 어느 것은 가슴이 메어지기도 하고, 또 어느 것은 천박하여 거들떠보기도 싫다. 두 번 세 번 만져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보는 것조차도 거리끼는 것들도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현상계(現象界)에서 잃어나는 것이고 우리 눈이 보는 세계이다. 우리의 미망(迷妄)함은 모두가 실유(實有)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모난 돌을 다듬어 주는 세월이라는 약이 있다. 돌아서며 남긴 진한 아쉬움이나 깊게 패여 헤어날 수 없는 아픔이라도 지나고 나면 삭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어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한다. 어린 시절에 겪은 아픔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남는 특별한 것이지만, 이 또한 무디게 하여 갈무리된 기억으로 더 많이 여물게 한다. 그래서 추억이란 고락(苦樂)에 관계없이 지나고 나면 아쉽고 그리운 법이다. 당시로서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다. 그 시절을 다시금 되돌아본다고 생각하니 아득한 그 옛날의 모습이 잡힐 듯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동네에서 사이가 좋았던 또래친구가 있었다. 옛날에는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집도 형제가 여럿이었는데 그 애는 내 살붙이만큼이나 가까웠다. 그 애는 동네 북쪽 끝에 홀로 자리한 외딴집에서 살았다. 그 집은 동네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집이었으며, 멀리서 바라보면 집 뒤로 높다랗게 하늘까지 뻗어있는 나무 한그루가 크게 눈에 들어왔다. 그 애내는 제니스를 두 대나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제니스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함께 들여온 미국 제니스사의 세계적인 브랜드인 라디오였다. 지금이야 라디오 두 대가 무슨 대수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라디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값진 물건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에서는 수시로 대국민 전황발표를 하였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내용이 석연치 않아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유층에서는 다투어 미국이나 일본 등지의 방송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전파 수신기를 고가로 구입하였으며, 그 수신기가 바로 제니스라디오였다. 쌀로 오십여 가마 상당의 값을 치러야 암거래(暗去來)로나마 구할 수 있었다니 당시에는 최고의 귀품(貴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기야 그 애 집 빼고 우리 동네 전체에서 제니스라디오를 한 대라고 가지고 있었던 집이 댓 곳도 안 되었다. 라디오를 다루는 방법도 기상천외(奇想天外)하여, 어떤 집에서는 금고 같은 큰 나무상자에다 라디오를 집어넣고 자물쇠로 잠근 다음에 미리 뚫어놓은 작은 틈으로 손을 넣어 라디오를 조정하며 들었다거나 어떤 집에서는 아예 벽장 안에다 라디오를 넣어놓고 자물쇠로 벽장문을 꽁꽁 잠그고는 왼 종일 한 방송만 들었다는 우스꽝스런 소문이 돌았을 만큼 라디오는 값진 보물덩어리였다. 일반 소시민이 라디오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해방이후의 나라 안 사정은 입에 담을 수조차 없을 만큼 좋지 못했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불협화음은 모든 체계를 비정상으로 만들었다. 이념적 갈등은 민족을 반쪽으로 갈라놓아 다시 찾은 광복으로 축복된 민족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진실을 진실이라 말하지 못하고, 진실인 것을 거짓으로 몰아세우고, 거짓을 보아 거짓이라 하지 못하고, 진실로 아는 세상이었다. 일순간에 정의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은 그런 시대였다. 너나없이 모두가 거꾸로 가는 세상에서 하루 세끼 끼니걱정까지 해야 하는 민초들이 당하는 생활고(生活苦)의 실상은 형언하기조차 민망하다. 그러니 라디오는 물론이고 신문마저도 접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특히 라디오는 인쇄매체와 달리 공간이나 시간의 제약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선호하는 물건이었지만 지나친 고가로 언감생심이라 보는 것조차도 사치였다. 그렇다 해도 밖의 소식이 궁금한 것은 빈부나 신분에 따라 다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귀를 간지럽게 하는 것은 이웃에게 주워들은 애기나 하다못해 유언비어였으니, 그 황당함이 짐작이 간다. 그 애네 집은 솟을대문처럼 조금 크고 높게 세운 대문과 고풍(古風)스런 느낌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관상으로는 지체 높은 양반가의 고답적(高踏的)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큰 마당과 안채가 정면으로 보이고, 뒤편으로는 후원(後園)이 자리하고 있다. 후원으로 가려면 안채를 왼쪽으로 돌아서 별채를 지나야 한다. 그 집은 이상하게도 안쪽 가옥은 일본식으로 지어졌고 담과 대문은 옛날 고가(古家)를 본 땄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애의 아버지가 바깥쪽을 헐고 지금의 형태로 집을 꾸몄다고 했다. 별채는 멀리서 보면 고즈넉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옆을 지나다보면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정지된 시간 속에 버려진 고독이 멈춰버린 삶을 증언하듯 고요만이 흐른다. 그 옆의 뒤울안에는 백여 년은 족히 넘겼을 넓적한 나뭇등걸 하나가 놓여있었다. 사람 손을 많이 탔었는지 고은 무늬 결이 닳아 반질반질해졌다. 후원에는 낮게 높일 잡은 조그마한 둔덕이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둔덕 위의 좌우 양쪽으로는 우리가 바위의자라고 이름붙인 책상의자 크기의 조그마한 바위가 군데군데 놓여있었다. 가운데 부분은 너부죽하여 애들이 뛰어놀기에 안성마침의 놀이터 구실을 하였다. 둔덕에는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높이가 어른 키에 서너 배는 됨직한 높다란 자작나무 한그루가 짙은 청록(靑綠)의 위세로 주위를 감싸주며 둔덕의 수호수(守護樹)로 고고히 서있었다. 그 아래에는 질박한 갈색 톤의 벤치하나가 비끄러매듯이 붙어있어 그 모습이 서양풍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구도처럼 눈에 크게 들어왔다.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여름밤에 아카시 꽃향기 흐르는 그 벤치에 앉으면 풀벌레 신바람 나는 연주소리의 짐벙진 맛에 취하고 겨워진다. 또래는 고모와 같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하지만 또래의 고모를 본 것은 그 애를 알게 된지도 한참을 지난 후였다. 그 해의 여름더위가 미련의 꼬리마저 떼어내고 가끔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의 땀을 시원하게 식혀줄 때였다. 둔덕으로 올라가다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니 약간은 헝클어진 까만 머리를 뒤로 재낀 채 문틀에 한 팔을 걸친 자세로 앉아 있는 처음 보는 아줌마가 보였다. 그 아줌마는 먼발치서 나를 보자 싱긋이 웃었다. 나이는 그렇게 많아보이지는 않았으나 얼마 전에 적십자병원에 통원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자주 보았던 2병동의 아줌마 환자와 안색이 닮았다. 그 아줌마는 얼굴이 너무 창백하여 흰색으로 분장한 배우처럼 보였다. 또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지 그대로 돌계단을 올라간다. 나는 또래를 불렀다. \"누구니?\" 또래는 내 물음에 뒤를 돌아보고는 처음에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리고는 그 아줌마 쪽으로 달려가더니 먼발치서 손짓으로 방문을 닫으라고 말했다. \"우리 고모야.\" 돌아와서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고는 둔덕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또래가 하는 다음 얘기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고모는 그 집에서 유일하게 떨어져있는 예의 별채에서 혼자 산다고 말했다.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꽃구경을 할 때도 있지만 하루의 대부분은 방안에서 라디오방송을 듣거나 뭔지 모를 다른 일을 하면서 보내기 때문에 자신도 어쩌다 한번쯤 보게 된다고 하였다. 나는 또래의 말이 너무나 망칙했고 이상하여 이유를 물어보려 했으나 더 이상의 얘기는 꺼려하였다. 별로 내색은 안했지만 싫은 눈치는 분명하였다. 그러나 고모에 대한 이해할 수 없었던 이때의 행동은 성인이 되어서 또래를 생각할 때마다 많은 혼란을 겪게 만들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며칠이 지난 후에 그 애내 집을 다시 가게 되었는데 그 애의 엄마가 나를 부르더니 그 집에서 지켜야 될 몇 가지를 얘기해줬다. 고모와 일부러 마주하여 얘기하면 안 되고, 어쩌다 고모를 마주치게 되도 가까이 가지 말아야하고, 긴 시간을 함께 있어도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집에는 놀러올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알았습니다.\"고 공손하게 대답을 하고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집에서 겪었던 얘기를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또래의 고모는 먼발치나마 만날 때마다 미소를 띠워 주었으며, 잠깐이라도 마주할 때면 잘 생겼다고 칭찬도 해주었다. 항상 곰살갑게 대해주어 속으로 가지고 있었던 편협했던 생각에 얼굴이 빨개졌었다. 고모는 꽃을 유난히 좋아하여 언제나 제철에 맞는 꽃으로 둔덕을 아름답게 가꿔놓았다. 물론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서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그곳이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천국과 같았다. 또래와 나는 둔덕의 이름을 짓기로 하고, 약속대로 며칠 후에 서로 의견을 내놓았다. \"나는 '비밀의 정원'이라고 지었어. 누구나 자기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곳이 있으면 하고 바라잖아. 다른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출입할 수도 없는 곳. 비밀의 열쇠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담장이 덩굴에 둘러싸인 메리의 비밀의 정원 같은 곳. 어때? 근사하지?\" 나는 '비밀의 정원'이라는 책이름을 따서 그대로 지었다. 그 애는 예전에 고모가 '작은 꽃동산'이라고 불렀다고 말하며 그 이름으로 하자고 하였다. 우리는 한쪽을 버리기가 너무나 아까워 몇 번을 망설이다 '우리들의 비밀의 정원 작은 꽃동산'이라고 다소 긴 이름으로 부르기로 정하였다. 그 후로 '우리들의 비밀의 정원 작은 꽃동산'은 비밀 아닌 비밀스런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틈만 나면 만나서 꽃구경도 하고, 나비나 메뚜기를 쫓으면서 재미있게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대지는 우리의 맨발의 감촉을 기뻐했고, 바람은 우리들의 머리카락과 장난하기를 좋아했다. 그 애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알게 모르게 이사 왔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애와의 만남도 황당할 만큼 이상하게 시작되었다. 그 애를 처음으로 만난 곳은 그 집 앞이었다. 엄마의 심부름을 다녀오다 그 애와 마주쳤는데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자 무엇에 놀랐는지 황급히 제집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나는 계면쩍은 얼굴을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지 며칠 후에 또 다시 그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멀리서 그 집 대문 쪽을 쳐다보니 그 애가 집 앞에 서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 애는 전처럼 대문 뒤로 살짝 숨어서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시 손을 흔들며 웃어주자 그 애는 대문을 재빨리 닫아버렸다. 그 애와의 만남 아닌 만남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친구로 사귀고 싶었지만 그 애를 달리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3년쯤이 지난 후였다. 둘 사이를 급속히 가까워지게 만든 큰 사건이 생겼다. 불행하게도 교사(校舍)로 쓰이는 학교 본관건물이 전기누전으로 큰 불에 휩싸였다. 그 날이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일(4월 18일)이었는데, 온 나라가 나서서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벌였고, 학교도 그날은 공휴일이었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정신없이 학교로 달려갔다. 학교 주위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소방차가 둘러싸고는 지금은 듣기도 어려운 사이렌을 끊임없이 울렸다. 인산인해를 이룬 구경꾼들은 동인천역 광장까지 밀려들어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학교 뒤쪽으로 불타는 건물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까지 용케 갈 수가 있었으나 그 이상은 밀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이리저리 허둥대기만 하였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중에 그곳에서 우연히 그 애를 만났다. 둘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학교 본관은 우리의 애타는 심정은 아랑곳없이 화재로 완전히 불타 재만 남았다. 그 후부터는 운동장 한쪽에 천막을 쳐놓고 한겨울에도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1학년 입학 때에는 뒤쪽 별관 건물이 신축중이라 별수 없이 천막에서 공부했었는데 또다시 천막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 애의 닫친 마음이 나에게 열렸다. 그 애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 애의 말로는 그 집에서 산지가 오래 되었어도 학교 이외에는 집밖으로 나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언제나 혼자 지낸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에서도 한쪽 귀퉁이에 우두커니 혼자 서있거나 앉아 있곤 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애 옆에서 말동무를 해주었다. 한 동안 온 동네가 들고나는 공사차량으로 시끌벅적하였다. 나의 유일한 놀이터였던 공원이 대대적인 공사로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 얼마 후에는 공원에 맥아더장군 동상을 세우고 온 시내가 떠나가라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벌렸다. 연일 붕가∼붕가. 폼 나는 해군군악대와 학교마다 돌아가며 밴드부가 신나게 행진하며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연도의 수많은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그들에게 화답했다. 나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여 가기 싫다는 그 애를 억지로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그 애는 처음에 집을 나설 때는 망설이고 당황하였으나 시내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린이 특유의 호기심과 붙임성으로 금방 달라졌다. 우리는 공원까지 올라가 새로 세운 동상을 감상하고 그 주위로 돌아가며 새겨 논 부조(浮彫)를 손으로 만져보면서 낄낄거렸다. 그때까지 동상은 물론이고 그렇게 크게 만든 부조도 처음 보았다. 공원에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지만, 우리는 요령껏 틈새를 비집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하고, 공짜로 나눠주는 솜사탕도 받아먹었다. 또래는 공원을 한껏 구경한 후에 갑자기 무엇이 생각이 났는지 날보고 전쟁놀이 하던 곳으로 가보자고 졸랐다. 둘이는 꼭대기에 인천 측후소가 있는 맞은 편 봉우리로 같이 갔다. 그곳에는 내가 전쟁놀이를 하면서 사용하던 산속 아지트가 있다. 그 애는 그곳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눈길을 뗄 줄을 몰랐다. 나는 야생화를 한 아름 꺾어다 그 애의 모자, 가슴, 팔뚝에다 계급장처럼 달아주었다. 그 애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 애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본적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애는 노래 부르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래를 부를 때면 움츠렸던 모습은 사라지고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노래를 부를 때는 보통 애들 이상으로 활기가 넘쳤으며, 완전히 다른 애처럼 보였다. 그 애는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는 거의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특히 '이별의 인천항'은 어른 못지않은 감정과 톤으로 구수하게 너무나 잘 불렀다. 그 노래를 부를 때 들으면 제니스라디오에서 들려오던 가수에 못지않았다. 나중에는 어른들 앞에 불리어가서 노래자랑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 애에게 노래를 잘한다고 노래박사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 애를 안 이후에는 공부하다 잠시 틈이 나는 시간에는 재빨리 그 애네 집으로 뛰어가곤 했다. 꽃동산 위에다 가져다놓은 넓은 평상 위에 눕거나 앉아서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곤 하였다. 어느 날이었다. 매미가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소리 내어 울어댔다. 무엇에 놀랐는지 매미우는 소리가 너무 요란스러워 노래를 부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화가 나서 매미보다 더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자고 두 손을 불끈 쥐고는 '이별의 인천항'을 악을 써가며 목청껏 불렀다. 잠시 후에 까악∼까악∼공중에는 까마귀 몇 마리가 하늘 위를 맴돌면서 지나갔다. 한동안 둘 다 목이 크게 부어 고생하였다. 그렇게 지나던 얼마 후에 나에게 큰 일이 생겼다. 당시는 엄한 숙부님 밑에서 훈육을 받던 때라 매사에 몸가짐을 조심하였었는데 그날따라 노래박사와 약속한 꽃동산 보물찾기놀이 생각에 마음이 들떠서 한참 맛을 알기 시작한 '이별의 인천항'을 공부 중에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잘못을 저질러 큰 사단(事端)을 만들었다.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크게 노(怒)하셨던 숙부님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들린다. 눈에 선하다. 그날 몇 시간을 꿇어앉아 꾸중을 들었다. \"배우는 학생이 천박한 유행가라니! 언제까지 응석받이로 있을 것이냐. 한번이라도 너의 장래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사람은 어찌 행동하는가에 따라 맞추듯이 자신이 만들어진다. 앞일은 자신의 행동에 따라 좋게 구성되기도 하고, 나쁜 쪽으로 바꾸게도 된다. 어떤 자세로 사느냐에 따라 자신의 장래를 훌륭하게 만들 수도 있고, 망쳐 놓을 수도 있음을 명심하고, 지금부터라도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깊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가 만들어져야하고, 그곳에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린다. 토대가 크고 튼튼하면 큰집을 용이하게 지을 수가 있지만, 토대가 약하면 작은 집조차도 짓기가 힘들다. 이러한 이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이 그 만큼 중요하다. 사람이 평생 동안 굳건히 딛고 설 받침이 되는 토대가 대부분 지금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뿌리를 굳건하게 뻗어 내린 나무는 폭풍이 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눈물이 쏙 빠지는 엄하고 엄한 꾸중을 들으며 근신하였다. 보물찾기는 고사하고 한동안은 금족령(禁足令)이 내려졌다. 그 후로는 '나는 매일 세 가지에 따라서 나의 처신을 살펴본다.(吾日三省吾身)'는 말씀을 깊이 새겨 신중하고 충실함을 채우려는 습관이 배이도록 평생 동안 노력하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핑하고 돈다. 꾸중들은 아픔 때문이 아니라 숙부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지나온 옛일이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은 명산에서 산삼을 캐듯 좋은 약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잘못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 사는 동안 우리가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반성이 우리의 남은 내일을 설계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미래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삶이 잠시나마 자신을 속였다는 오해와 삶은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다는 그릇된 생각과 삶은 주어진 운명이니 흘러가는 데로 묻어갈 뿐이라는 무의미와 아무런 계획성이 없었다는 무책임이 모두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삭막한 현실에서 한 걸음쯤 뒤로 물러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자.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하나의 작은 행운」(Monika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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