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의 미망(彌望)
웃통까지 시원하게 제쳐 발겼던 엊그제의 염치불구는 옛일이 되었다. 살얼음이 살짝 덮인 얼음냉수 한 사발을 단숨에 꿀꺽 들이키고는 얼얼한 가슴을 흐르는 땀과 함께 쓸어내리며 여름아 물러가라고 호방하게 웃었던 게 엊그제가 아니었던가? 삶의 무게에 눌리어 어찌어찌 살다보니 너무 데운 이파리가 제풀에 지는 소리조차 귀 뒤로 흘리고는 첫눈을 보게 되었으니 흐르는 세월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으랴. 변화의 당위성을 노래해 주는 이는 어디에 있는가? 뻥 뚫려 허전해진 내 마음의 공동(空洞)을 메울 길이 없다. 한해를 알차게 마무리해야할 끝 무렵까지 용케도 달려왔건만, 무자년(戊子年) 검신(檢身)의 달을 목전에 두고는 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 가로막은 꼴이 되어 그마저도 쉽지 않게 되었다. 올해는 누구나처럼 기대도 많이 했었고 궁둥이에서 비파소리 나도록 뛰지 않았는가. 조금이나마 나아질까 그렇게 바랐건만, 날랜 솜씨를 발휘하여 야무지게 주판알을 몇 번이고 튕겨봐야 붉은색 글자만이 '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달래듯 위로하듯 말할 뿐으로 나오느니 한숨뿐이니 이 애달픈 심정을 누가 알리오. 한겨울을 무사히 넘길 일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진다. 엊그제 마지막으로 불태운 만추(晩秋)의 감흥은 새빨간 잔상으로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있고, 불꽃만큼이나 강렬했던 그때의 흥분도 그대로인 채 고이 간직하고 있으나, 매섭게 불어오는 칼바람은 옷섶을 거침없이 파고들며 무정하게도 일말의 온정도 허락지 않는다. 첫눈이 펄펄 내리는 오후의 흥겨움은 서설(瑞雪)조차 의미가 사그라지듯 스러지고 오히려 눈발이 걱정거리처럼 보였다. 동장군은 땅 속에다 재빠르게 한 무더기의 분신을 숨겨놨는지, 길 잃은 강추위가 들어 닥쳤다고 해봐야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도 땅 밑에서 솟는 냉기가 송곳으로 찌르듯 끝없이 파고들어 가뜩이나 쪼들린 마음에다 몸마저 더욱 움츠러들게 만든다. 게을러서 차일피일 미루다 아니되겠다싶어 밖으로 나섰더니 뒤통수에 대고 궁시렁 소리가 요란하다. 햇수는 오래됐지만, 올해로 꼭 10년을 맞췄다. 기특하게도 그 동안 고장 한 번 안 났었고 아직도 괜찮은 것 같은데, 열효율이 떨어진다고 설비가게에서 바꿀 것을 권하여 진작부터 보일러를 바꾸려고 생각하고만 있다가 추위가 목전에 닥치고 나서야 바쁜 척을 하니 내자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말이다. 좋은 날씨는 놔두고 하필이면 추운 날을 골라서 나가느냐는 걱정스러운 마음 씀을 왜 모르겠는가. 놓칠세라 가슴에다 소중히 담고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설비가게로 향했다. 주인장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끝내는 사람 사는 얘기로 돌아섰다. 그 주인장 얘기로는 평생을 이 장사로 먹고 살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힘든 때는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삼중고, 사중고, 오중고에 남아나는 것이 없단다. 가뜩이나 힘든데 추위까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니 마음을 단단히 잡아야겠지만 실물경제의 침체와 더불어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기의 불황속에 맞는 올겨울은 삶에 지치고 희망마저 간데없는 민초들이 쉽사리 한 겨울의 모진 한파를 이겨낼 수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이러다가 설비가게 주인장의 비관적인 전망대로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가장 혹독한 겨울을 맞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겁이 난다. 겨울의 문턱에 닿기도 전에 불어 닥친 된 바람에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으나 추위조차 느낄 수가 없을 지경으로 참담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나마도 우리의 애씀이 폭풍우를 그물로 잡듯 하는 무모하고 쓸모없는 일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이란 이상하게도 무슨 조화가 숨어있는지 불의(拂意=일이 뜻대로 안 됨)와 쾌심(快心=일이 뜻대로 됨)이 종이 한 장 차이라도 잘 되는 쪽보다는 언제나 안 되는 쪽으로 추가 기운다. 불확실성(不確實性=Uncertainty)이란 용어를 사용한지가 오래되었지만 요즘처럼 그 단어를 실감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불확실성의 의미가 판단이나 의사결정에 필요한 적절한 정보의 부족이라고 한다면, 1,2차 석유파동을 어어 하다 준비 없이 당했을 때나, 개천(開天)이래 처음이라는 대 환란(외환위기)으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을 만큼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을 때도 같았을 것이라 추론(推論)되지만 요즘보다는 고통이 덜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아우성들이다. 고통의 크기야 지나간 시기의 기억이니 체감정도의 차이가 별 것이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가늠조차 어려울 만큼 하루가 다르게 나쁜 쪽으로 변하는 요즘상황은 무언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불안에 떨고 있는 가슴을 더욱 옥조인다. 옛말에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⑴'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의식주 가운데서도 먹는 것이 제일이 아니던가. 세상이 변해서 지금은 예전처럼 농경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게 됐지만 그렇다고 옛사람이 요즘사람보다 못나서 농사를 생명처럼 여긴 것이 아니다. 옛날에도 농사만이 능사가 아님은 요즘사람이상으로 세세히 알고 있었다. 농사를 경제 원리로만 따지는 요즘의 어리석은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한 예로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도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말하기를 '부(富)를 구하는 것으로는 농사(農)는 공(工)보다 못하고, 공은 상(商)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2,000년 전 사람도 농사가 경제적 측면에서 불리한 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어째서 고사(故事)가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고사성어를 통달하듯 외어 글 쓸 때나 보탬이 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그림책에나 나오는 말로 전락하였으니 애석하기만 하다. 어찌됐던 그래도 인간은 먹는 것이 제일이니 무엇보다 우선이어야 한다. 먹는다는 의미를 수사(修辭)를 곁들여 다르게도 말할 수가 있겠지만 본질은 연명하려고 먹는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그 다음은 배부른 후에나 논할 얘기다. 사흘 굶으면 못할 노릇이 없다고 했지 않은가. 먹지 못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구실도 못하는 법이다. 말이 나왔으니, 옛날에는 먹는 것을 해결해주는 농사가 왕정(王政)에서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고로 사직단(社稷壇)에서 먹는 곡식과 그것을 잘 자라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서 사일(社日)⑵을 맞아 제사를 성대히 올리기까지 하였다. 곧 사(社)는 땅 귀신이고, 직(稷)은 곡식의 신이니, 이를 섬기며 일 년에 두 번 춘사(春社)와 추사(秋社)를 경건하게 올렸다. 춘사일(春社日)에는 곡식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비는 것이고, 추사일(秋社日)에는 그 해의 풍년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하늘을 대하던 자세였다. 하늘을 섬기되 오로지 백성의 삶을 위해서 섬겼다. 그렇게 받들어져야할 백성이 지금 울고 있다. 기뻐서 우는 것이 아니라 서러움에 복받쳐 울고 있다. 쌓인 삶의 무게가 천근이요 만근이라 살기가 힘들어 울고 있다. 비나리치는 자들이 득세하여 바른 것이 사라졌으니 억울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우는 것이다. 언젠가 『정자정야(政者正也)⑶』를 다루면서 '정(政)이란 나라를 바르게 한다.'는 뜻이라고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의 자세를 가지고 항상 조심스럽게 살펴야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드렸던 말씀이 떠오른다. 백성이 곧 하늘이다(人卽天)라고 했다. 멀리는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부터 가깝게는 동학의 정신(人乃天)을 살펴보더라도, 예부터 백성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나를 알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은 가까이 할지언정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 백성만이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⑷'고 하였다. 나라의 근간(根幹)인 백성을 위하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을 중히 여겼던 이 중에 한사람이 다름 아닌 맹자(孟子, BC 372∼289)이다. 그는 '백성이 제일 귀하고, 나라가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⑸'고 했다. 맹자의 사상 중에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방벌론(放伐論)으로 후대의 사상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그 시발이 '백성은 나라의 근본(民惟邦本)'에 두었음은 불문가지다. 맹자가 민위귀(民爲貴) 사상을 얼마나 중하게 여겼는지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의 첫머리 말미에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의미를 인용하여 다스리는 자를 논하며 백성을 대하는 몇 가지를 말했는데, 그 첫째가 백성의 마음을 읽고 그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며, 이익을 얻게끔 하여 다스리는 것이 다음이고, 그 다음은 가르쳐서 깨우쳐 주는 것이고, 아래로는 법을 내세워 강제로 규제하는 것이고, 가장 못나게 하는 정치는 백성들과 싸우는 것이라고 했다.⑹ 어느 시대의 어느 위정자들도 비켜갈 수 없는 난제이지만, 최소한 백성들이 이익을 얻는 길로 인도할 줄 알아야 현명한 지도자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마찬가지다. 백성들이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낼 수 있게끔 해줘야 칭송받고 제대로 된 지도자로 대접을 받는다. 맹자(孟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정치를 물었을 때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사람이 지녀야 할 착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일반 백성들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따라서 사람이 지녀야 할 착한 마음도 없어진다.'고 말했다. 또 '사람이 지녀야 할 착한 마음이 없어지게 되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간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등 모든 악을 저지르게 된다. 그들이 죄를 범하게 된 뒤에 법으로 그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곧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해서 잡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임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마련해 줌으로써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양육하게 하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이 들더라도 죽음을 면하도록 해주고 그렇게 한 뒤에 그들이 착한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어야한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저항 없이 따라오게 된다.⑺'고 말하였다. 《춘추(春秋)》⑻는 고대 중국에 있었던 노(魯)나라의 역사서로 공자(孔子)가 지었다. 국조(國祚)가 쇠잔했던 소국(小國)의 역사에 불과하지만 공자가 지었다는 상징성외에도 《춘추》가 중요함은 '예와 의를 밝히는 가장 큰 근간(禮義之大宗)'으로 대의와 명분을 앞세운 점이며, 이는 '춘추가 옳고 그름을 판별한 책이기 때문에 정치하는 사람이 읽으면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다.(春秋辯是非, 故長于治人)'고 하여 나라를 경영하는 자는 필독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서도 치민(治民) 운운하는 것은 만권서책(萬卷書冊)을 읽었으나 그 밝은 뜻을 익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글씨를 베끼는 필생(筆生)이나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마천도 이 부분이 안타까워 '무릇 예(禮)란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고, 법(法)이라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소용되는 바는 누구든 쉽게 알고 있으면서, 예란 것이 소용되는 바는 어떤 사건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⑼'고 탄식하고 있음을 본다면 이를 이해치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법대로 하기 전에 먼저 백성을 깨우쳐주는 것이 순서다. 년 초에 나라 안을 온통 들썩이게 만들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상기해본다면 예(禮)의 의미와 앞뒤 순서의 중요성을 실감할 것이다. 《주역(周易)》은 세상사의 변화를 이야기한 것이고, 《춘추》는 세상의 도의(道義)를 논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돌려놓아 올바르게 만드는 데는 《춘추》만한 책이 없다고 하였다. 당사자에게는 섬뜩한 얘기지만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경세(經世)에 관한 책만이 아니라 '비록 천자(天子)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깎아 내리고, 옳지 않은 제후들은 가차 없이 물리쳤다'는 한 구절만이라도 밝은 뜻을 익혀 알았다면, 그 당시에도 그러 할진데 요즘 세상에서야 말해 무엇 하랴. 퇴출대상 1호다. 물론 유권자의 몫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만, 공복(公僕)이라는 자리에 않은 이들의 몸가짐이 지금보다는 조금쯤 나아졌을 것이다. 우리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힐난(詰難)하는 것은 '하늘은 한 사람을 현명하게 하여 모든 사람의 어리석음을 가르치게 한다.⑽'는 말씀을 믿기 때문이며, 정치가 미덥지 못하지만 그래도 정치에 기대고 얘기하는 것은 정치를 바로하면 정치가 어느 것보다 확실하고, 더욱 효율적이며, 특히 대규모의 집행이 가능한 유일한 수단으로 그로인하여 궁핍하고, 불우하고, 장애가 있고, 상대적인 약자인 백성들이 크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행여나 유의막수(有意莫遂)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줏대 없는 목낭청(睦郎廳)이 아니고서야 모두에게 떨어진 발등의 불인데 어찌 심심상인(心心相印)으로 공분(公憤)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다른 쪽을 쳐다보고 욕하거나 원망하지 말자. 중요한 것을 '내 탓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이고 내가 주인공이라는 자세이다. 세상사 잘하고 못하고는 생각하기 나름이요, 모두 제할 탓이 아닌가.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不怨天 不尤人)'고 했는가? 누굴 탓하겠는가. 인간을 두고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다. 사회라는 사전적 의미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사회라는 말 속에는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어려운 경제로 모두가 속이 제 속이 아닐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는 양보와 배려만이 상생(相生)하는 길이 된다. 오불관언(吾不關焉)하거나 적전분열과 같은 분란은 어느 때나 가장 미련한 짓이다. 눈앞에는 합심해서 대적해도 넘기 어려운 거대한 적인 불황이 다가오고 있지 않는가. 제 밥그릇만 챙기려고 욕심을 낸다면, 군대용어로 말하면 각개격파를 당하여, 지리멸렬(支離滅裂)할 것이고, 여력이 없는 민초들의 삶만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어려움이 닥쳤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모두가 열심히 하여 이겨내야 한다. 하늘도 귀중한 말씀으로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주지 않는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어둡게 드리우는 그늘을 걷어내자. 우리에게는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지 않은가.
주장이나 말씀에 오해의 소지가 생길 부분에 한해 註를 달았다.
* ⑴ 《史記列傳》第三十七「麗生陸賈列傳」 '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 '왕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 역생(麗生)은 진한(秦漢)교체기에 지금의 하남성 서남부에 있던 진류(陳留) 고양향(高陽鄕) 출신으로 한고조 유방을 찾아가 계책을 바쳐 진류(陳劉)를 쳐부수고 광야군(廣野郡)에 봉해졌다. 초한(楚漢)쟁패 중에 그는 제왕(齊王) 전광(田廣)에게 유세(遊說)하여 한나라에 귀속시켰으나, 한신(韓信)이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로 쳐들어오자 제왕은 역생을 끓는 물에 삶아 죽였다. * ⑵ 사일(社日) : 일 년에 춘분과 추분을 기점으로 그 무렵에 두 번에 걸쳐 제사(祭祀)를 올렸다. 즉 입춘이 지나고 다섯 번째 돌아오는 무일(戊日)을 춘사일(春社日)로 잡아 이 날에 올리는 제사가 춘사(春社)이고, 입추가 지나고 역시 다섯 번째의 무일(戊日)인 추사일(秋社日)에 올리는 제사가 추사(秋社)다. * ⑶ 《論語》「顔淵篇」 '季康子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란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대꾸하길, 정치(政)란 바름(正)이다. 당신이 솔선하여 정직하게 살며 백성을 통치한다면 어느 누가 감히 정직하게 살려고 하지 않으랴.' * ⑷ 《尚書》「五子之歌」, '其一曰 : 皇祖有訓, 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 予視天下, 愚夫愚婦, 一能勝予. 一人三失, 怨豈在明, 不見是圖. 予臨兆民, 檁乎若朽索之馭六馬. 為人上者, 奈何不敬!' - 중국은 저 아득한 상서시대(尙書時代)에 이미 인류 최초의 민주(民主)라는 말이 있었다. 《상서(尙書)》를 보면 「다방(多方)」에서 1회, 「함유일덕(咸有一德)」에서 3회에 걸쳐 민주(民主)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물론 그 뜻이 현재의 민주주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의 민주(民主)는 그 의미가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이지만 고대의 민주(民主)는 백성과 임금을 함께 어우른 말이다. 「함유일덕」의 내용 중에 '일반남녀가 스스로 다함을 얻지 못한다면 백성과 임금이 다 같이 그들의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匹夫匹婦, 不獲自盡, 民主罔與成厥功.)'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민주는 백성과 임금이다. 하지만 민(民)의 속뜻에는 '백성이 곧 하늘이다(人卽天)'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이 배어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맹자는 민심을 잃은 포악한 군주는 무력(武力)을 써서라도 토벌하여 쫓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하(夏)의 걸왕(桀王)과 은(殷)의 주왕(紂王)을 들기도 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정당성을 부여한 방벌론(放伐論)이다. 설마하니 2,300년 전의 주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담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가 '백성이 제일 귀하고, 나라가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고 강조하였음을 상기할 때에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민주(民主)의 의미가 국민이 주인이지만, 진시황(秦始皇)이 대륙을 통일하면서 정치체제를 전제군주(專制君主)제로 바꾼 후에는 민주(民主)라는 개념(槪念)도 민지주(民之主)로 뒤바뀌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진시황이후로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의 의미가 거꾸로 천자(天子)를 의미하는 '백성의 주인(民之主)'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절까지 군사독재라는 겸제(箝制)의 시대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소름이 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⑸ 《孟子 》「萬章 上」, '孟子曰,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是故 得乎丘民而爲天子, 得乎天子爲諸侯, 得乎諸侯爲大夫.' * ⑹ 《史記列傳》第六十九「貨殖列傳」 太史公曰, \"夫神農以前 吾不知已 至若詩書所述虞夏以來 耳目欲極聲色之好 口欲窮芻豢之味. 身安逸樂 而心誇矜埶能之榮使 俗之漸民久矣. 雖戶說以眇論 終不能化. 故善者因之 其次利道之, 其次教誨之, 其次整齊之, 最下者與之爭.\" 태사공이 말했다. \"신농씨ⓛ 이전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지만 《시경》이나 《서경(書經=尚書)》에 기록된 우(虞)나 하(夏)나라 이래로 눈과 귀는 아름다운 소리와 모습을 무척 좋아하고, 입은 고기 맛을 보려고 했다. 몸은 편안과 쾌락을 좋아하고, 마음은 권력과 재능의 영광스러움을 자랑하려고 했으니 백성들이 이러한 풍속에 물든지 오래 되었다. 비록 오묘한 이론을 가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설명을 해도 교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를) 잘 하는 자는 이치에 따라 하고, 그 다음은 (백성을) 이롭게 하여 이끌어주며, 그 다음은 (백성을) 가르쳐 깨우치며, 그 다음은 (백성을) 획일적으로 다스리며, 가장 못하는 자는 (백성과) 다투는 것이다.\" -ⓛ 신농씨(神農氏) : 중국 상고시대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태호(太昊)복희씨(伏羲氏), 황제(黃帝)헌원씨(軒轅氏)와 더불어 삼황(三皇)으로 불린다. 성은 강(姜)씨이고 그 어머니가 신용(神龍)에게 점지를 받아 사람의 몸에다 소의 머리를 한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신농(神農)씨를 낳았다고 전한다. 신농씨는 불의 덕(火德)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염제(炎帝) 또는 적제(赤帝)라고 불렀다. 불이니 상징색은 붉은색이고 계절은 여름이며 방위는 남방이다. 농경(農耕)이 여기에 속하게 되어 신농씨나 합칭(合稱)하여 염제신농씨라 부른다. 《寶鷄文史資料,1993, 第11輯》에 의하면, '염제신농(炎帝神農)은 몽욕(蒙峪)에서 태어나 구룡천(九龍泉)에서 목욕하였으며, 강수(姜水)에서 성장하였다. 이리하여 강(姜)이 족성(族姓)이 아닌 씨칭(氏稱)이 되었다. 현재 보계 남쪽의 강성보(姜城堡) 일대에 강씨(姜氏)가 살았던 마을이 그대로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중국 섬서성(陝西省) 보계시(寶鷄市) 남쪽에 천대천하고(天臺天下古)라 일컫는 천대산(天臺山)일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이 지역은 염제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었던 곳으로 염제는 이곳에서 홍수를 막아 백성들을 살렸고 백성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쳤으며 백초(百草)를 맛보아 약초의 효과를 가려내 주었다고도 전한다. - 《史記》「三皇紀」, '神農氏嘗百草始有醫藥(신농씨가 백 가지 초목(草木)을 맛본 후에 비로소 의약(醫藥)이 있게 되었다).' - 따라서 후세에 농업과 의약의 조신(祖神)으로 불리고 있으며, 또한 차(茶)와 관련된 기록도 많아 다인(茶人)들에게는 차(茶)문화의 시조(始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 《茶經》下「六之飮」, '茶之爲飮 發乎神農氏 聞於魯周公(차를 마시는 것은 신농씨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노공(周魯公)에게서 들었다).' 참고로 여러 문헌에서 이를 말하고 있음을 본다. 《詩經, 小雅甫田之什, 甫田》에 '나의 밭은 농사가 잘되니, 농부들의 경사로다. 거문고 타고 북을 치며, 신농씨를 맞아들인다.(我田旣臧, 農夫之慶. 琴瑟擊鼓, 以御田祖.)' 고 말하고 있는 전조(田祖)는 선색(先嗇)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처음에 밭을 갈은 자를 이른 것이니 바로 신농(神農)을 지칭하는 것이다. 《周禮, 籥章》에 '온 나라가 풍년을 田祖에게 기원하면 豳雅를 연주하고, 土鼓를 두드려서 田晙을 즐겁게 한다.'고 한 것도 이것을 말함이다. * ⑺ 《孟子》「梁惠王 上」, 曰 :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辟邪侈, 無不爲已. 及陷於罪, 然後從而刑之, 是罔民也. 焉有仁人在位, 罔民而可爲也? 是故明君制民之産, 必使仰足以事父母, 俯足以畜妻子, 樂歲終身飽, 凶年免於死亡, 然後驅而之善, 故民之從之也輕. 今也制民之産, 仰不足以事父母, 俯不足以畜妻子, 樂歲終身苦凶年不免於死亡. 此惟救死而恐不贍, 奚暇治禮義哉? 王欲行之, 則盍反其本矣?' * ⑻ 공자가 편찬한 《춘추(春秋)》는 춘추시대 때인 노은공(魯隱公) 식고(息姑) 원년 BC 722년에 시작하여 애공(哀公) 14년 BC 481년에 끝나는 242년간의 노나라 역사책이다. 애공 치세 때에 기린이 나타났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공자는 군주들이 무도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라고 한탄하며 《춘추》를 끝냈다. 이를 획린(獲麟)이라고 한다. - 중국에서는 사령(四靈)이라 하여 용(龍)과 봉황(鳳)과 거북(龜) 그리고 기린(麟)을 신령스런 동물로 여겼다. - 공자는 2년 후인 BC 479년에 죽었다. 《춘추》는 편년체(編年體)로서 춘하추동(春夏秋冬) 방식으로 저술되어 그것을 줄여 《춘추》라 했다. 후에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自治通鑑)》은 《춘추》와 같은 편년체 사서(史書)로서 《춘추》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해설서인 《좌전(左傳)》은 《춘추》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춘추》는 씌어진 글자 하나하나마다 그 의미가 심오하고 준엄하고 지극할 뿐만 아니라, 만물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모두 《춘추》 안에 있다(萬物之散聚皆在春秋)고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의와 명분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춘추대의라 하여 엄중한 대의명분의 뜻을 새기기도 하고, 준엄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춘추필법에도 같은 뜻이 담겨져 있다. 《춘추》의 의미를 살피는데는 《사기》「태사공자서」의 내용만으로도 어느 정도 새길 수 있을 것이다. 태사공 사마천에게 대부(大夫)직에 있던 호수(壺遂)ⓛ가 물었다. \"옛날 공자께서는 무엇을 위해 《춘추》를 지으셨는가?\" 태사공은 동중서(董仲舒)②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라며 그대로 들려주었다. \"나는 동중서(董仲舒)에게서 듣기를 '주나라의 왕도가 쇠퇴하여 행하여지지 않으매, 공자께서 노나라의 사구(司寇)③가 되었으나, 제후들은 해치려 하고, 대부들은 공자님의 뜻을 펼치려 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공자께서는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추구하려는 도(道) 또한 세상에 행해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242년에 걸친 역사의 시비(是非)를 따짐으로서, 천하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였다. 비록 천자(天子)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깎아 내리고, 옳지 않은 제후들은 물리치며, 직분을 지키지 못한 대부들은 성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관한 일을 달성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실제적이지 않은 말로 기록하려고 했으나, 그 보다는 차라리 재위에 있는 자들이 행한 일의 시시비비를 거론함으로서, 그 결과 그 일을 더욱 더 절실하고도 명백하게 할 수 있었다.'(余聞董生曰, '周道衰廢, 孔子爲魯司寇, 諸侯害之, 大夫雍之. 孔子知言之不用, 道之不行也, 是非242年之中, 以爲天下儀表. 貶天子, 退諸侯, 討大夫, 以達王事而已矣.' 子曰, '我欲載之空言, 不如見之于行事之深切著明也.')\" -ⓛ 호수(壺遂) : 전한(前漢) 무제(武帝 7代, BC 141∼87) 때 사람으로 양(梁), 즉 지금의 개봉시(開封市) 출신이다. 사마천과 함께 율력을 제정하여 무제에게 건의하였다. -② 동중서(董仲舒) : 전한 때의 유학자. 그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학문은 오직 유학뿐이라고 무제에게 건의하여 유학을 통치철학으로 삼게 하였다. 이후로 유학은 2000여 년 이상 중국 봉건사회의 정통적 통치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의 학설은 기존의 유학에 음양오행설을 가미시킨 것으로 사람의 인성(人性)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선(善)해진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주장했다. -③ 사구(司寇) : 춘추전국시대 때 관직이름으로 주로 관리의 규찰과 형옥을 담당한 관서의 장(長). * ⑼ 《史記列傳》第七十「太史公自序」, '夫禮禁未然之前, 法施已然之後. 法之所爲用者易見, 而禮之所爲禁者難知.' * ⑽ 《菜根譚》「前 218」, '天賢一人以誨衆人之愚' -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현명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갖춰야 될 소양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정직은 첫째로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품성이다. 다음으로 편벽(偏僻)을 갖지 않는 가치관을 지녀야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먼 장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한다. 그 외에 봉사와 희생정신이 필요하고, 많은 사람들을 인화와 조화로 이끌어야하니 성정이 무난해야할 것이다. 보통의 지도자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지도력을 요하는 곳이라면 무엇보다 인품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인품에는 비범함이 있다. 《시경(詩經), 小雅甫田之什》에 「거할(車舝=수레굴대빗장)」이라는 노래가 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탄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혼행길에 나서며 기쁨을 묘사한 노래이다. 그 말미(五章)에 '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글이 있다. '높은 산을 우러르고, 큰길을 간다.'라는 뜻이다. 산이 높으면 누구나 올려다보게 된다. 큰길이 나면 당연히 그 길로 가보기를 원한다. 그와 같이 백성 스스로가 우러러보며 믿고 따를만한 인물이어야 한다. 사마천도 '비록 이르지 못하더라도 마음은 이를 향하여 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그것이야말로 저절로 우러러 따르게 되는 것으로 인지상정이라고 말했다. 백성을 위하여 성실을 다하는 지도자가 우러러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한 끼 식사에 열 번 일어선다.(一饋十起)'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다. 출전은 《회남자(淮南子), 卷13 氾論訓》이며 우(禹)임금의 덕망을 칭송한 고사(故事)다. 우임금은 '자신에게 도(道)로써 가르칠 사람은 와서 북을 울리고, 의(義)로써 깨우치려는 자는 와서 종을 치며, 어떤 일을 고하고자 하는 자는 방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와서 경쇠를 치며, 소송할 일이 있는 자는 와서 작은 북을 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우임금은 어진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 번 식사하는 동안에 열 번이나 일어났으며(一饋而十起),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와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럴 때 선(善)을 다하거나 충(忠)을 나타내지 못한 자는 그 자질이 부족한 자이다.(敎寡人以道者擊鼓 諭寡人以義者擊鐘 告寡人以事者振鐸 語寡人以憂者擊磬 有獄訟者搖鞀. 當此之時 一饋而十起 一沐而三捉髮 以勞天下之民. 此而不能達善效忠者 則才不足也.)'라고 하였다. 일궤십기(一饋十起)란 오로지 백성을 위하여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가를 이르는 것으로 지도자의 각별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된 사람을 가려 쓸 줄 아는 지도자는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만들고 백성들도 믿고 따르게 된다. 패도(覇道)의 시대라 일컫던 중국의 전국시대에 전국칠웅(全國七雄)이라 불리던 일곱 나라가 - 진(秦), 초(楚), 위(魏), 조(趙), 한(韓), 연(燕), 제(齊) - 대륙의 대부분을 할거(割據)하던 때에 강력한 법체계를 주창한 상앙(商鞅, BC 390∼338)을 발탁하여 내실을 충실히 다진 진효공(秦孝公)이 패자가 되었고, 천하를 놓고 다투던 초한(楚漢) 쟁패에는 장자방(張子房=張良)과 소하(蕭何)는 물론이거니와 한신(韓信)이라는 걸출한 명장을 얻음으로서 유방(劉邦)이 천하를 품안에 넣을 수가 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 백성의 생활이 피폐해 졌을 때는 백성의 세세한 곳까지 살펴볼 줄 아는 어진 사람이 필요하였음도 지나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사기(史記), 위세가(魏世家)》에는 위나라의 문후(文侯)가 재상을 임명하기 위해 이극(李克)에게 자문을 구하는 내용이 있다. 문후가 \"선생께서 과인에게 '집안이 빈한하면 어진 아내를 그리게 되고, 나라가 혼란하면 훌륭한 재상을 그리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자(成子)와 적황(翟璜) 둘 중에 누가 적합하겠습니까?(先生嘗敎寡人曰 '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 今所置非成則璜, 二子何如?)\"라고 물었다. 이극은 다섯 가지를 살펴 이를 짚어보면 적임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충언한다. \"평소에 지낼 때는 그의 가까운 사람을 살피고, 부귀할 때에는 그와 왕래가 있는 사람을 살피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그가 천거한 사람을 살피고, 곤궁할 때에는 그가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어려울 때에는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살피십시오.(居視其所親, 富視其所與, 達視其所擧, 窮視其所不爲, 貧視其所不取, 五者足以定之矣, 何待克哉!)\" 위나라의 재상으로 임명된 사람은 비록 문후의 동생이었지만 어진 마음을 가진 성자(成子)였다. 그는 평소에도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잘 살피고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자신의 소득 중에 극히 일부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보탰을 만큼 백성들을 살폈다. 자연히 그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많게 되었다.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 성자(成子)는 지금의 우리처럼 무슨 부동산 관련세금인지 뜯어고쳐 자신들 먼저 혜택을 보려는 자들과는 근본이 다른 시대의 의인이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일수록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다. 근래에 유행병처럼 회자되는 코드인사가 아니다. 피폐해진 나라살림과 백성의 궁핍한 삶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편이냐 아니냐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저돌적인 인물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 가려 쓸 줄 알고, 공(功)을 내세우기보다는 험한 곳과 힘든 것을 마다않고 백성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줄 아는 어진 인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의 본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진정으로 이 시대를 이끌고 갈 수 있는 지도자라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몇몇의 고사(故事)를 예(例)로 들어 말한 것은 고사란 무수한 세월에 걸쳐 시행착오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귀중한 경험치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살아있는 지혜의 보고로서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역사는 반복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역사는 두 번 반복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역사는 수레바퀴와 같아 끝없이 돌고 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두 번이던 그 이상이던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고사가 주는 교훈이 더욱 값진 가치로서 고사를 더욱 중히 여겨야 된다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다. 고사에는 여러 유형의 사건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의외로 단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로병사의 숙명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사를 제대로 알고 활용할 수만 있다면 앞길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방도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깨달게 하는 역량을 키워주어 바른 삶을 살게 하는 길을 터준다. 당연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할 나위없는 좋은 지침서가 된다. 그것이 고사를 예로 든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옛말에도 '고전을 읽고 충분히 이해하여 새로운 의미를 터득한다면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고 했지 않은가. 세상일이란 하루아침에 일어서지 않는다. 사람들은 의외의 일이 벌어지거나 상식에 반하는 일을 당하면 모두가 경구(驚懼)하며 야단법석을 떨지만, 옛말에 '세상사 모든 일은 단지 하루아침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없으며, 오랫동안의 일이 점차적으로 쌓이다가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다.'고 하여 그 결과에 그 원인만이 있을 뿐이지 의외의 일이란 없다고 하였다. 이를 두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작은 것이라도 끝에 가서는 '잃은 것은 터럭이나 그 차이는 천리만큼이나 크다.(失之豪厘 差以千里)'고 말하는 것이다. 도리를 벗어나고 상궤(常軌)에 어긋나고 불합리하게 되거나 경우(境遇)와 조리(條理)에 맞지 않게 되는 것도 오직 그렇게 되도록 만든 까닭이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그 속을 살펴보면 모두가 억지를 쓰기 때문으로 본분을 잃어 버렸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은 《史記列傳, 第七十 太史公自序》에서 '사람들은 그 도달하려고 하는 이치는 하나인데 그 생각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며,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은데 가는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다(天下一致而百慮, 同歸而殊塗).'고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을 인용하여 말하며, 중요한 것은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다(神者生之本也)'고 하여 바르게 하려는 생각이라고 했다. 반걸음을 쌓지 않으면 천리에 이를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작은 물줄기를 쌓지 않으면 강하(江河)를 이룰 길이 없음을 새겨야 한다. 비록 갈 길이 멀고 험하다 해도 천천히 하나하나 꼼꼼하게 어긋나지 않도록 짚어가며 나아가는 것이 바르다할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여러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역사 속에 진심으로 백성을 위했던 지도자가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그와는 반대로 만물은 극(極)에 달하면 쇠퇴하게 된다는 물극즉반(物極則反)이란 하늘의 이치조차 모르고 주어진 영광을 지워진 굴레로 만든 어리석은 지도자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혹시나 그들의 탐욕 때문에 받들어져야할 백성이 오히려 끼니마저 걱정해야했던 기막힌 적은 없었을까? 그리고 묵묵히 당할 수밖에 없었던 백성으로서는 어느 곳을 쳐다봐야만 했었을까? 우리는 복 받은 백성일까?
「하나의 작은 행운」(Monika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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