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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

정상근 2011. 05. 02. 오후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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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


행여,
가는 길에
길을 묻는 이가 있다면
거기에는 길이 없다 말하여라.

행여,
가는 길에
길을 묻는 이가 있다면
思惟하라 말해 주어라.

물어서 도달한 거기에는
만나고자 하는 님은 없다 말하고
분별과 관념과 탐욕과 집착의
무거운 짐을 모두 벗어놓고
思惟의 길을 가라 이르라.

사유의 시작은 어둡고 두려운
길이 아닌 길이며 
계단없는 계단이나
이내 밝은 빛이 그대를 인도 하리라
조용한 음성으로 그대를 인도 하리라.

돌고 돌아
길고 긴 사유의 끝에
그대는 
지혜의 문 앞에 도달하리라.
자유의 문 앞에 이르리라.

고난을 딛고
두려움을 이겨내어
문을 열면 마침내
긴 고난은 큰 뜻으로 이루어져
大自由를 얻으리라.
自由人이 되리라.

댓글 24개

김현배 2011. 05. 02. 오후 07:21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십자가가 주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짊어지고 갈 때, 진정한 자신의 해방에 이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길 자신의 십자가 그것이 바로 행복의 근원이겠지요. 스스로를 해방시킨 날 존재는 말할 것입니다. 나는 이겨냈다고 그리고 해냈다고.

민순호 2011. 05. 02. 오후 08:50

< ..> ~ '공자천주?' ..

정상근 2011. 05. 02. 오후 10:02

네..^^ 待..

정상근 2011. 05. 02. 오후 10:03

원죄로부터의 해방이 곧 자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양미선 2011. 05. 02. 오후 11:41

고난을 딛고 두려움을 이겨내어 문을 열면 마침내 자유를 얻는다는 말씀... 공감이 되는 부분 입니다... 많은 깨달음을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박성실 2011. 05. 03. 오전 09:30

명상을 하신다는 것을 알고 나서인지, 혹은 글을 통해 계속 암시되어서인지, 최근 시에서 흔적이 역력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도가 깊어지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삶에서 타협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진리를 얻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사유의 세계가 나를 &#50614;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헤헤 왠지 고민 상담을 하는 것 같네요. 살면서 길을 묻고 싶은 때가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그저 내가 삶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이정표가 곳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네요.

박종영 2011. 05. 03. 오전 11:05

사유하는 시간, 사람들은 자기 발견에 연연해 하지요 대자유 또한 일상에서는 알지 못하지만 구속력의 안에 들어서면 자유가 얼마나 그립고 유익하고 평화로운지를 압니다. 귀감이 되는 글에 머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정상근 2011. 05. 03. 오전 11:43

건강에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술 담배는 확실하게 끊어지니..^^

정상근 2011. 05. 03. 오후 12:03

아고 또 질문이다..ㅋㅋ 살아가면서 분명하게 느끼는 것은 항상 \"답을 내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하는 식이지요. 평정심이 유지된다는 방식이 아니고..길이 아닌 곳에 내가 없게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즉, 어떤 불편함이 있을 자리나 상황이 예견되어 그 자리에 내가 없으면 불편할 일도 없어지는 것.. 또 불편한 상황이 전개가 되어도, 그 불편함이 마음에 걸리지 않아지는 것.. 박성실님은 하나님을 믿으시니.. 기독교적 사유는 '믿음'에 있습니다. 흔히들 기독교는 수행이 없는 종교라는 말을 하는데 제 생각을 그렇지 않아요.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을거에요...\"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살아서 나의 세계에 들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에 드는 기독교적 방법은 기도이고요. 기도하는 행위가 깊고 깊어지면 어느 순간 자신을 여의어버리는 지경이 되지요. 爲無爲의 경지.. 깊은 마음으로 집중을 하는 것이 명상이고 그 끝에는 자신을 여의게되는 것이 명상이니.. 불가나 도가에서 주장하는 禪수행의 행과 다를 바 없는 결과인 것이지요. 불가에서도 염불을 하니.. 그리고 기독교적 수행의 결과로 믿음과 소망이 끝을 보면.. 순정의 사랑 에너지가 넘치게 됩니다. 끌림이 아닌 밖으로 흘러넘치는 에너지.. 100%의 이타적인 순정심...불가의 자비하고 같은.. 그런데, 이런 수행적인 결과를 얻기까지는 지난번 성실님께서 느끼셨다는 \"진공을 맞딱뜨린 두려움의 계단\"을 수도 없이 건너야 되거든요..ㅎㅎ 그런데, 박성실님 정도로 명상을 진행했다면,, 성실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거기에 분명 뚜렷한 이정표가 있음을 발견하시게 될 겁니다. 명상을 하실 때...요기의 주술 같은 것을 하지마시고..\"그냥 내면의 세계에 접속을 하겠다\"라는 마음으로 한 번 해보세요.. 히히..또 선생님 된 것 같으다..ㅋㅋ

정상근 2011. 05. 03. 오후 12:08

감사합니다.^^

박동수 2011. 05. 03. 오후 10:23

기독교의 원죄라는 것은 누가 씌운것이거나 어떤 행위의 결과물도 아니며 오직 스스로 쒸운 굴레이라고 말 해야 하는것이지요 그 원죄로 인하여 스스로 힘들여야고 스스로 고통을 겪으며 돌아가는 길(歸天)이 어려워 진다는것, 그 굴레를 벗을 수 있는것은 어떤 깊은 사유도 아니고 불가에서 말하는 수행도 아니며 오직 예수의 피로 통한 속죄의 원리라고 말 했지요. 그것이 바로 구속력이 있는 예수의 피로 싯김을 받아 중생의 길에 있어서야 된다는 것. 즉 부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라고도 합니다. 위의 글을 읽었을 때 기독교의 원죄의 벗어나는 이치를 사유의길 일종의 수행같은 것으로 속죄 될수있는 이야기 같아서 진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아닐까 생각 됩니다. 예수의 피는 희생과 사랑의 극치를 말하는것이니 어떤 수행이라던가 깊은 사유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오직 그에 대한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비슷한 것같으면서 그 진의는 어딘가에 다른 차원이 아닌기 싶으네요 그 이상은 모릅니다만.. 너무 뜻깊은 정작가님의 글을 읽다보니 좀 이상해는것 같아서 ㅎㅎㅎㅎㅎ 감사 합니다.

김현배 2011. 05. 03. 오후 10:47

예수의 피로 인한 속죄 그리고 그분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정신력이라 할 수 있겠지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힘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감수성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순서야 어찌되었든 힘과 감수성은 동전의 양면, 뫼비우스띠 같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에서 시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힘있는 그분을 생각해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정상근 2011. 05. 04. 오전 01:32

네..제가 기독교 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나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종국적인 목표(종교가 목표하는)하는 것이 신의 세계로의 인간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 이라면, 거기에는 믿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하는 성가에서...사랑이란, 믿음이 더할 나위 없는 지경에 이르고 그 믿음이 간절한 소망에 닿으면 사랑이란 아름다운 결과물을 얻는 것으로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제넘게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 종교에 대하여 생각의 경계를 넘어버린 우를 범한 것 같아 또 다른 사유의 거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문숙 2011. 05. 04. 오전 04:15

이크 한 글 더 본다는 게 밤을 온통 투자해 버리게 합니다 어떤 아나나운서가 불꽃 튀는 경쟁 뭐 뭐 --했는 데 여기는 바늘 끝 같은 에리한 지헤의 섬광이 ---붜 하는 그런 곳 같습니다 여기선 사색의 향기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일생 유독 자기 삶의 길에서 그 어떤 한 분을 제대로 알고 늘 실제적 참 교제를 나누는 그 어떤 사람- -저는 참 행복을 아는 그 분을 닮아가기를 바라지요

정상근 2011. 05. 04. 오전 05:17

이크..축구보다 열어봤더니 또 답글이..ㅋㅋ..불꽃튀는 경쟁..뭐뭐 했으면 백지연아나운서겠네요..ㅎ..그 분 요즘 책도 쓰고 그런다두만,,절대적인 믿음이 기초된 대화에선 언제나 넘치는 행복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지요. 미륵반가사유상 같이 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같이...자신과의 대화 또는 절대자와의 끝없는 대화..아름다운 삶의 가장 소중한 단면이 아닐런지..^^

박성실 2011. 05. 04. 오전 09:38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네 맞습니다. 기도가 '명상'과 비슷하죠. 맥락이 거의 같아요. 사실 제가 하고 있는 명상은 기도이지요. 전에 요기들이 하는 산스크리트어를 하면서 명상을 했던 경험은 힌두 명상을 배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기도 중에 이정표가 발견되는 것도 맞습니다. 나와 직면하여 내 숨은 욕구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 안에서 소리를 듣기도 하고요,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 있을 뿐 사소한 것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 것 또한 위험하기 때문에 때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다 때로 내면의 음성이다 말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살아서 하나님의 세계에 드는 방법이 기도는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가르침은 믿음과 선행이랍니다. 이것은 사랑 안에 포괄되기도 하죠. 다만 이것을 수행을 통해 삶 안에 습득하는 것이 많이도 간과되고 연습이 부족하여 수행이 없는 종교라는 등, 개독교라는 등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죠.. 씁쓸하네요..;;; 올려 주신 글월에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좋은 봄 날 만끽하셔요.

박동수 2011. 05. 04. 오후 05:16

여기서는 누구누구의 것이 옳다 아니다하는 경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대화 그리고 절대자와의 차원적 대화에서 깨달음을 나누어 보는 장으로 인식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아무리 좋은 이론이던지 아무리 고귀한 종교적 진리이라도 경쟁 심리로 대화를 하면 끝은 분쟁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해할 수있는 지혜를 갖는 사람은 그 이해의 기준에서 수긍하고 아니면 로댕이 되기만 하면 되는것이 좋을 듯 하군요. 그 과정이 어떤 행복감을 주고 삶의 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군요 평보다는 대화의 기준이 되었으면 바램입니다. 김문숙님 정상근님 참 좋습니다...............

정상근 2011. 05. 04. 오후 06:11

네네..ㅎ..제 글과..김문숙님 글 속의 경쟁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제 글에 대한 평이 아니라..김문숙님께서 시청하신 티브이 프로그램 속에서 아나운서의 멘트 였구여....제가 경쟁이란 말은 쓴 것은 김문숙님께서 보신 프로그램이 백지연 아나운서의 프로그램을 보셨을거라 짐작을 한,,,단순한 대화였답니다.^^ ..

민순호 2011. 05. 06. 오전 08:22

<허물~ ..> 선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아의 진면목을 찾는다고 음식도 제대로 못먹고 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고 세상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이 무꼬> 만을 화두로 삼고 한평생을 보냈는데 그저께 입적하신 큰스님의 다비식에 다녀와서 유품을 챙겼더니 거기에 생명보험 증서가 있었다. 나무 아미타불! - 정현 -

정상근 2011. 05. 06. 오후 12:21

믿져 봤자 본전 삶으로 생겨나 어느 뉘가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밑져 봤자 본전인 삶 이리 가면 어떻고 또 저리 가면 무에 다를까 오기 전에는 올 줄 뉘 알았으며 가고 나면 누구의 기억이 무엇이랴. 허공을 떠다니는 비누거품은 안과 밖이 둘이 아닌 것을 무엇을 보겠다고 무진애로 비누방울을 쫓을 거나 -정상근- 無智亦無得 以無所得誥 **큰스님의 신도 중에 보험사원이 있었나 보군요. **평생을 참선을 하고도 큰스님 다비식에 육을 움직인 수행이라니.... 평생을 참선하며 버리고도 큰스님 다비식에 갈 두 발을 아직 남겨놓았으니, 생명보험증서가 닿을 마음자리가 아직 남아있었나 봅니다..^^

민순호 2011. 05. 07. 오후 08:23

<'종자 없는 마음~' ?? .. > 무명의 업보로 죄를 짓고 괴로워 하는가? 누구를 원망하랴 네가 헝클어 놓은 인연의 실타래가 아니더냐 네 고통을 받아드려라 인욕 바라밀을 통로로 하여 해탈하거라 죄는 종자가 없다 마음도 종자가 없다 어서 무명에서 벗어나라 그때~ 광명이 너를 안으리라. - 정현~ -

정상근 2011. 05. 07. 오후 10:42

귀신 방귀씨 귀신 방귀씨를 얻어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려니 꽃이 피었거든 벌나비에 몸을 맡겨 열매를 맺게 하고 열매가 익었거든 그 맛을 알고 씨를 얻어 만 중생과 나눌 줄 알아야 비로소 고난의 길 위에 환한 빛이 비추어지리라.

정채균 2011. 05. 09. 오전 10:48

하늘 가는 좁은 길 우리의 삶이 구도자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문숙 2011. 05. 17. 오전 10:55

늘 사념 깊고 아름다운 시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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