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우주기원론과 창조신화)
- 5_b. 이승 다시보기 - 그 옛날 장자(莊子, BC 4세기경)는 '천하에 지극한 안락(安樂)이란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몸을 살리는 안락이란 있을까 없을까?⑼' 그 물음에 답하며 우리를 일깨워줬다. 그 보다 후에 사람인 전한(前漢)의 유안(劉安, AD ?∼122)도 '능히 무악(無樂)에 이르는 사람이라면 즐거워하지 않음이 없고, 즐거워하지 않음이 없다면 더없이 큰 즐거움에 이르는 것이다.⑽'고 했음에 비추어 보면, 세상을 허투루 사는 것은 잘못 사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천지의 운행을 주제로 삼는 큰 차원의 도가(道家)사상이 인간의 일반적인 삶의 가치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 또한 인간이니 이승에 발을 담그고 있는 한에는 인간답게 살라는 것을 말하며 그게 올바른 삶이라는 뜻이다. 그가 말한 '지극한 즐거움은 그것이 즐거운 줄 모르는 것이요, 지극한 명예는 명예가 없는 것이다(至樂無樂,至譽無譽)'는 뜻은 이승은 한 때에 불과하니 내세를 준비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승은 어차피 타의에 의해 주어진 삶이라고 해도, 결국은 나의 삶이고 더구나 거부할 수 없는 운명까지 지워졌으니 이왕이면 이승에 사는 사람답게 난잡함을 피하고 보람되게 살라는 말씀이다. 어차피 주어진 한평생이니 정신을 어디에다 얽매이지 말고 멋지게 살라는 충고다. 우리 같은 범부가 성인이 말하는 하늘땅이 살아서는 잠자리요, 죽어서는 관이라는 그 높이까지는 따라할 수가 없겠지만, 모두가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까하고 걱정하는 판에 엉뚱한 곳에다 정신을 놓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은 짚고 가야 할 것이다.⑾ 이승을 가볍게 보는 자세야 말로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것에만 오직 매달리려는 어리석음이며 크나큰 집착에 빠지기 십상이니 당연히 자유로워야 될 정신을 한곳에 붙잡혀 꼼짝 못하게 매워놓게 될 것이다. 이는 하늘의 진리는 일부러 멀리하고 자기가 세상에 세운 것들을 믿는 교만이다. 장자가 지락(至樂)을 통해서 세상 사람을 깨우쳐 교훈을 주는 경세적(警世的)인 의미에다 문의(文意)를 맞춘 것도 이승을 제대로 살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명(命)이 몸담고 있는 오늘마저 당당하게 자신하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이승보다 내세의 충실에 더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지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험 삼아 죽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냐? 당연히 내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름을 인정해야한다. 그러니 내세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승과 법칙이 다를 것이니 모든 게 확연히 바뀔 것이다. 따라서 영원이란 의미에 담겨있는 개개인의 모습은 아예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나란 이름도 소용없을 것이고 나란 동질성도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도 보질 못했기에 추측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처럼 우주의 공리에 따른 진화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 그런데도 나의 영항(永恒)만을 꽤하려는 집착에 사로 잡혀 있다. 그러니 진시황의 불로초 구하기나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이승에 살면서 그걸로 만족하며 끝내야 당연한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있나하고 들여다보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 혼란에 휩싸이는 꼴이다. 이는 흙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죽지 않고 살려는 집착일 뿐이다. 그러니 마음의 끝에서 안다는 인(因)이나 얻게 되는 참된 이치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고 반문하게 된다. 내가 이승에 태어났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혹여나 나를 영원히 나이게끔 하려는 발상은 결국은 뭣이냐, 이름만 다르게 부를 뿐이지 지금의 목숨을 연장하려는 집착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밖에 더 되겠는가. 무엇이 본능적이어야 하는 생물학적인 인식구조마저 혼란케 하였을까?
(인식(認識,understanding, knowing) - 지식(知識,knowledge)이나 인지(認知,cognition) - 은 생물체가 생존하기 위한 절대행위이다. 따라서 모든 인식의 바탕에는 완벽하게 자기화한 기억인자(記憶因子)를 수용할 수 있도록 인식자의 구조가 빈틈없이 깔려있어 이를 깔끔하고 철저하게 처리하게끔 되어있으며, 이는 인식자의 생물학적 본성인 생명체의 조직(組織,organisation)에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든 정보는 생존을 위한 욕구란 필터를 거쳐 확인한다. '생물은 자기의 구성요소들을 스스로 생성하고 유지하는 자기 생성적 자율적 체계(autopoietic system)를 갖추고 있으며, 인식이 행위를 통해 세계를 산출하게 하는 인식의 이런 작업방식을 가능케 하는 것은 뿌리기제로서의 강제성 때문이다./움베르또 마뚜라나(H. R. Maturana)외 共著/최호영 譯, 2007, 《앎의 나무(Der Baum der Erkenntnis)》' 이는 당연히 생명체가 지닌 본능으로 다양성을 갖추려는 진전이며 생존의 필수조건인 자연에 적응하려는 진화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은 체계의 질서에 대한 순응이다. 인간은 사회체제의 틀 속에 있음으로 반영활동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상(像)은 언제나 존재라는 질서체계의 제약 안에서 통제를 받는다. 사회∙문화적 실천을 바탕으로 하고, 그 의식을 매개로 하여 객관적 실재들인 과학이나 이념이나 도덕과 예술과 종교와 같이 여러 형태로 분류하여 정신적으로 자기화하여 습득하는 과정에서도 완전한 영향 아래에서 받아들인다. 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육신의 세계에서는 취사선택이란 과정을 통해서 동일한 결말로 지어진다. 이처럼 인식활동은 주어진 환경의 한계 속에서 신경생리학적기제에 따라 자신에 맞게 이루어진다. 이는 인간의 감각체계와 신경계의 구조 및 작용방식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발전수준에 의해서도 제약되는 두 가지의 강화기능이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인식은 여러 경로를 거치면서 지식이 되고, 사회와 문화적인 체계라는 과정을 통해서 궁극으로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정당성을 기준으로 하는 결과로 갖도록 한다. 그러므로 '4.(참뜻)의 註3에서, 사회질서라는 환경은 개인의 심성(心性)에 큰 영향을 끼칠 만큼이나 좋고 나쁨에 깊이 관여한다.'고 했듯이 인식에도 같은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다 잘하지만 명운(命運)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간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 시시한 재물이나 지위나 지식에 대해서는 내세로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인데 어찌 욕심을 내느냐고 시시콜콜 불호령을 내리며 집착하지 말라고 귀가 닳도록 반복하며, 하늘의 창고에다 쌓으라고 강권하다시피하면서도 정작 큰 것인 목숨을 내세로 가지고 가는 것에는 일언번구 말이 없을까가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어찌 목숨을 구걸하는 것(영항을 바라는 유애)에는 집착이란 말을 쓰지 않을까? 재물 등을 탓하는 것은 작은 집착을 나무라는 것이지만, 나란 이름으로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크기를 가늠할 수없는 큰 집착이다. 그런데도 꿈쩍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옹호하기까지 한다. 왜 긴가민가하기만 할뿐 목낭청(睦郎廳)이 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나마 한 가지는 확실한 게 있다. 내세가 있다면 내세를 다스리는 이치가 있을 터인데, 어찌 이승의 사람이 이승의 것으로 내세를 만들려고 하는가에 생각이 미치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내세를 볼 수 있다고, 본 것처럼 내세의 옳고 그름을 이승의 잣대로 저울질하여 맞추려고 하는가? 그것이 오히려 황당하지 않는가? 이승의 것의 연장으로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그곳에다 이승의 삶 전체를 내맡기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어느 누구는 경(經)에 쓰여 있으니 굴뚝같이 믿으려하지만, 대부분은 '본 것이 아니라 봤다더라.'를 후대의 이야기꾼의 구전이나 전 시대의 수많은 신화나 작품집으로 〈전승〉된 자료에 의거해서 기록했을 뿐이다. 후대에 쓴 작품이나 기록이란 그런 것이다. 더구나 동일 문화권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전도서」 3:22절에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⑿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고 하였다. 그러니 이승에서 제 손으로 수고해 얻은 것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삶이다. 그것이 사람마다 누릴 복이요 제몫이다. 전의 세상이나 지금이나 다음에 올 세상이나 어느 세(世)에서든 마찬가지로 그 세의 삶을 위하여 그 세에서 제몫을 다하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세에선 이승을 위해 살고, 이승에선 내세에게, 그곳에선 그 다음 내세를 위해서만 살게 된다면, 언제나 빈껍데기로만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신의 영감(靈感,Inspiration of God)이나 성령의 감동(感動,Moved by Holy Ghost)이었다고 말들 하지만, 신화나 설화를 토대로 하는 대부분의 경전(經典)의 저작은 그런 형식을 취해왔다. 영혼, 불멸, 구원 등은 인간의 이름으로 가르칠 수가 있는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간전승〉이란 한계까지 극복해야 했음으로 무엇보다 높은 권위의 상징성을 부여하여야만하였다. 고대 중국에서도 뛰어난 저작을 특정한 성인(聖人)에게 가탁(假託)하여 권위를 부여하는 문화적 관습이 있었다. 한 예로, 동양의학 최초의 본초서(本草書)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本草經,本經)》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이름으로 되어있지만, 그로부터 3000년 가까이나 지난 후한(後漢 AD 25∼220) 말에 장중경(張仲景 AD 150∼219)이 집성편찬(集成編纂)한 것이다. 그것을 당시의 관습에 따라 조신(祖神)으로 숭앙하고 있던 신농씨(神農氏)의 이름을 빌어 《신농본초경》이라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꾸란》, 《마하바라타》, 《몰몬》을 포함하여 다른 책들도 신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미국 인디언들의 많은 전통도 신에 의해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Vecsey, 1991] 유란시아서(The Urantia Book) 와 Talking with Angels : A Document from Hungary와 같은 일부 현대의 뉴에이지 책들마저도 신에 의해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Other works claiming divine inspiration include the 《Qur'an》, 《Mahabharata》 and 《The Book of Mormon》. Many traditions of North American Indians claim to be divinely inspired.[Vecsey 1991] Some contemporary New Age books claim divine inspiration, such as The Urantia Book and Talking with Angels: A Document from Hungary.)'
지금까지 장광설을 늘어놨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구별이란 의미가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인 능력자가 전세나 이승이나 내세를 관장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능력이 많은 이가 뭐가 아쉬워 삼세(三世)를 별도로 만들어 수고를 아끼지 않느냐다. 이는 오직하나 인간을 상주거나 벌주기 위해서일까? 그래서 하늘나라와 지하세계가 생기고, 고대 이집트인은 부활사상을 생각해내고 수메르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몸으로 영원의 나라에서 살게도 만들었을까?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천지창조에서 보듯이 그때 사람들의 생각을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경(經)의 내용이 형언할 수 없는 지극한 경지에 있다고 해도, 인간의 지식과 통찰력이 갖는 일정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며,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을 지녔다고 해도 한 시대의 사고나 문명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범상치 않은 예언을 적시해도 오늘날까지 예측할 수가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뛰어난 예지능력을 지녔을 뿐이다. 전능한 신의 예언이라면 범천(梵天)의 세계에 비한다면 찰나에 불과한 겨우 3천년 내지 4천년 후의 미래인, 무소부재인 전능한 힘으로도 중국이나 신대륙을 보지 못한 것은 제쳐 두고라도 하루가 일겁(一劫=4억3천2백만 년)이라고 했으니 길어야 5분정도의 앞인 오늘조차,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비애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잔혹함이 가득한 모든 것을, 내다보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하니 예언자들의 예지능력이었다고 해야 그나마 수긍이 간다. 하늘은 우주 만물을 기획하고 조율하며 균형 잡아 이끈다. 만약에 내일이라도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지구가 필요 없다고 하면 한 순간에 소멸시킬 수도 있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구멸종의 재앙은 당장이라도 벌어질 수 있는 시나리오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어떤 첨단 관측기기나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는 점이 어찌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일 뿐이다. - 오히려 다행인지 모른다. 안다고 해봐야 뾰족한 수도 없다. - 그러니 지구에서 신이 아무리 인간을 위하고, 세상사는 게 모두 헛것이라고 외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만물은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일 뿐이다.(萬物齊同)'라는 도가의 제물론(齊物論)처럼 '만물은 모두 하나이다.(萬物皆一也)/《장자》「덕충부(德充符)」' 인간만이 유별난 게 아니다. 이게 우주가 지니고 있는 특별함인 평등이고 공평이다. 우주를 통괄하는 진리는 그대로 변함이 없는데도, 아직도 하늘의 말씀을 읽어내지 못하는지 그 옛날의 천동설을 숭배하던 그대로 모두가 작은 지구에만 연연하고 있다. 아무리 큰 지구의 일이라도 광대한 우주의 거시적 진화에 속하는 미시적인 변화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물 속의 개구리가 세상을 말하듯이 지구의 입으로 우주를 농락하려 한다. 강조하듯 누누이 얘기하지만, 이승의 삶이란 영겁의 세월 가운데 한 각(角)을 만들어 작은 마디로 개개인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이니 긍정적으로 살아야하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을 만드는 핵심이며, 지구라는 영역에서 비록 만년 세월을 넘는 헤아리기조차 벅찬 장구한 시간으로 여겨지는 기간을 영위하고 있지만, 결국은 끝이 있는 한정된 속에서 사는 인간은 주어진 하나하나마다 누구의 삶이던 하루하루가 더욱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⒀ 이승은 선택이 아니었으니 이승의 삶이 이승다워야 하는 참다운 삶이 아니어도 된다는 무책임하고 헤픈 생각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삶이다. 이카루스(Icarus)의 비상만을 꿈꾸던 아니던, 《적과 흑》의 나태처럼 줄리앙 소렐(Julien Sorel)이 거짓 삶을 살며 돌이킬 수 없는 타락한 서사시를 쓰던 아니던, 비록 존재가 곧 생(生)이요 가치라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양상을 무시하고 인생을 헛되이 써버리는 비틀린 가치관과 잘못된 행동의 결말이라 해서 존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소위 유정(有情,인간을 비롯한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이라고 하는 생물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본능과 학습능력에 더해서 창조의 힘까지 가진 동물은 오로지 인간 종이다. 자연법칙만이 적용되는 존재의 세계에 살면서도 확인할 수 없는 육체이면의 형이상학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 계획표대로 따라야 한다는 알고리즘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물론 이는 기준의 정당성을 어느 곳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작디작은 지구에 존재하는 종교마다 그 원대한 계획을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고 해도, 중요한 점은 하나의 폐쇄된 종교가 만드는 기준은 아니다, 라는 점을 인식하여야 한다.
(현대종교는 원시사회의 주술적 신앙에서 출발하여 정교화 된 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교리를 체계화하며 더욱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예로 유대인의 종교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사유의 산물이고, 그들 민족이 수없는 세월동안 겪은 신앙적인 사고가 만든 외적인 제도일 뿐이다. 따라서 세계관이 다른 민족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히브리 성서〉의 내용은 좋게 보아 유대종족의 역사이니 그들 삶의 기록(?)이 되겠지만, 이방인에게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남의 삶이다. 그러니 구약에서도 신을 아는 유대종족은 신에 의해 구원받는 구도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방인은 오로지 심판받고 멸망당하는 구더기와 같은 존재로만 되어있는 것이다.⒁ 인간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승에서 우리가 사는 한은 인간상호 간의 계약과 삶에 임하는 성실성과 자기행위에 대한 성찰과 양심에 따른 행동이며, 이는 세상의 어느 것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 신이 주도하던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 전자의 시대로 추가 기운다면 수긍이 가겠지만, 신정국가에서조차 인권은 없었다. 금도금한 우상을 받든다는 죄과로 근위대인 레위(Levi)족 병사를 시켜 3000여명이나 동족의 남자만을 무참히 살육한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 가질 수 있는 극단의 한계를 넘는 짓이다. - 그러니 결코 신앙하는 행동에 비해 뒤지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방인들이라고 해서 신을 모르지는 않을 터. 인간이 신을 알게 된 것은 2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들도 유대종족이 부르는 신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을 인식할 수 있다. 유대인의 신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사유의 산물이다. 비록 이방인들이 이름을 다르게 부르고, - 그렇다고 유대종족이 부르는 이름이 신을 대표한다는 뜻은 아니다. -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비슷한 목적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가능하다. 하늘은 오직 하나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오직 자기 것만이 진짜라고 우긴다고 해서, 하늘마저 인간들처럼 갈라지지는 않는다. 《장자(莊子)》에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다.'는 글귀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잔잔하게 가라앉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가라앉은 것을 잔잔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니 아니니 해석이 구구하다면, 누구나 공감하는 거울로 삼을 수가 없을 것이다. 수천 년에 걸쳐 수없이 보아왔듯이, 교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기라도 하면 이단으로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너 아니면 말고 식으로 돌아서서 다른 하늘을 만들고는 내가 진리다고 외친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 줄 아는가? 진리란 하나뿐임에도,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아브라함에 얽힌 뿌리논쟁에서 보듯이,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별다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리라고 내세우면서도 보편타당한 천지간의 공리(公理)를 떠나 국한된 신 안에서만 인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절대진리화 된 편견적이고 주관적인 교리일 뿐이지 진리는 아니다. 이것은 한 여름에만 푸른 잎이 무성한 낙엽송더러 사철 푸르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야말로 한 옴큼도 안 되는 진짜를 뒤집어쓴 가짜다. '삶을 대지로부터 받은 것 중에는 오직 소나무와 측백나무만이 정기를 지니고 겨울이건 여름이건 푸르다.⒂' 진리는 그런 것이어야 누구나가 공감하고 따른다. 그러니 말씀의 속에 담겨있는 뜻을 믿어야지 눈에 보인다고 무턱대고 문자만 믿다가는 한데로 빠지기가 십상이다.)
당연히 보편타당한 진리인 하늘의 공리(天道)여야 한다. 그 작용에 의해서 우리는 그 길로 가는 것이다. 육체이면의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아니 회귀(回歸)이다. 일억 년 전의 나와 오늘이 내가 같듯이 본래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기원부터 이어져온 자연법칙이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신이 우주를 창조한 게 아니다(God did Not create the universe.).'라는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의 주장도 납득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줄기차게 거론했던 하늘은 여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하늘일 수는 없다. 벽견(僻見)이나 편견에 매달린 집착으로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나눔조차 구별하고, 자신의 것만 선하고 옳다고 우기며, 목적을 위해서는 사악한 정치와도 손을 잡고 전쟁도 마다 않으며, 자신만이 선택받았다는 최면과 아집에 둘러싸인 한 집단이 믿음으로 가진 하늘이 결코 아니다. 친소(親疎)의 구별을 두지 않는 평등과 공평과 보편적인 공리를 섭리로 가진 누구나의 하늘이다. 그 하늘은 유대인과 무슬림의 하늘이고, 미국인과 이라크인의 하늘이며, 그 옛날 히브리어(Hebrew language)를 쓰던 노아와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를 사용하던 마야나 아즈테카인의 하늘이기도 하다. 모두에게 똑같이 비추어야하는 하늘인 진리의 하늘을 말한다.
(한 민족만이 미개했기에 측은하게 생각했기 때문일까? 고대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국 사이에 낀 간어제초(間於齊楚,약자가 강자들의 틈에 끼이어 괴로움을 받음)의 안쓰러움에 그 쪽만을 편들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모두의 하늘이라며 전능한 능력으로 내린 똑같은 말씀이 히브리어(Hebrew language)로는 명확히 쓰여 졌으면서도 고대이집트나 마야나 아즈테카의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나 수메르어(Sumerian language)나 아카드어(Akkadian language)처럼 설형문자(楔形文字,Cuneiform Writing)나 고대중국의 갑골문(甲骨文,Chia-ku-wen)으로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무슨 사연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궁금증만 더해질 뿐 전혀 모를 일이다. 그들은 은혜의 말씀을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안타까움을 안은 채로 대홍수 때 휩쓸려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노아는 의(義)로 목숨을 구했지만, 나머지는 말씀조차 듣지 못했던 사람들인데 어떤 의(義)를 찾아야했을까? 무소부재(無所不在,Omnipresence,ubiquity)의 신이란 어떤 모습이기에 그들에겐 없었을까? 그러니 어느 때는 맞고 어느 때는 맞지 않는다면 그건 주장이지 진리랄 수가 없다. 따라서 말씀이 틀리지 않는다면 책이 잘못 쓰였다. 그런데 말씀도 책도 바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에 담겨있다. 모세가 창세기를 쓰면서 중국이나 신대륙을 어찌 알겠는가. 혹여 알았다고 해도 자신들 조상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 지역과 그곳 사람들까지 등장시킬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노아가 대홍수를 당할 때에도 바로 옆인 고대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오히려 더욱 역동적인 역사를 쓰고 있었다.⒃ 모세가 누구냐? 위대한 인물이 그런 정도도 몰랐겠나. 창세기의 천지창조이야기는 자신들이 그렇게 해서 생겼거니 하고 생각한 그들 조상에 관한이야기에 불과하다. 그걸 자꾸 더 크게 벌리려니 이치에도 합당하지 않고 말씀을 왜곡시키게 만든다. 왜 그런가? 우리가 유대인이 안 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 ⑼ 《莊子/外篇》「至樂」, '天下有至樂. 无有哉. 有可以活身者. 无有哉.' * ⑽ 《淮南子》「原道訓」, '能至于無樂者, 則無不樂. 無不樂, 則至極樂矣.' * ⑾ 「전도서 9: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①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 ① 무릇 네 손이/…/다하여 할지어다. : 이는 인생의 행복이 수고하는 가운데 낙을 누리는 것인 바,(2:24, 3:13,22) 진정 낙을 누리고자 한다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 ⑿ 본래 신후사(身後事)란 죽고 난 뒤의 일이니 장례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직역하면 '그의 뒤에 있는 것(what will happen after him, NIV; what will occur after him, NASB; what shall be after him. KJV)'의 뜻이다. 이는 문맥상 사람이 죽은 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본 절의 전반적인 의미는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 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는 무관해지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그 결과를 얻고 그것을 누리는(즐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뜻인 듯하다. * ⒀ - 오쇼 라즈니쉬(Rajneesh Chandra Mohan Jain), 《지혜로운 삶/1. 배꼽/#근원》 - 《莊子/內篇》「大宗師」, '佚我以老, 息我以死.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늙게 만듦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쉬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은 잘사는 것은 곧 자기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인 것이다.)' 논자 주 : 비록 인간의 삶이 영겁(永劫)에 비해 찰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주 짧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만일에 우리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죽음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함에 비추어 본다면, 삶이란 본래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감이요, 죽음은 근원으로의 회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은 추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나를 찾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죽음은 오직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삶을 짓누르고 억압하지 않고, 삶을 바르게 산 사람들에게만 훌륭한 것이 된다. 죽음은 삶을 아름답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보람 있는 것이다. 죽음은 이승을 사랑하고, 춤추고, 축복하는 사람들에게만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이승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자들에게만 주어진 빛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축복이었다면, 죽음은 축복의 절정이다. 하지만 죽음은 이승답게 살기를 포기했던, 인간이길 거부하며 산 자들에게는 저주이고 재앙일 것이다. * ⒁ 단테(Dante, Alighieri) 著/김의경 譯, 1992, 《신곡》/「천국편 제32곡, 지고천(至高天)」, '모든 것은 영원한 법칙에 의해 정해져 있으므로 손가락에 가락지가 끼어지듯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대응되고 있다. 때문에 진실 된 삶으로 서둘러 온 이 아이들이 여기서 받는 복의 정도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제 공덕 때문이 아니라 남(부모)의 공덕 덕분에 하나의 조건 아래 자리를 얻었으며, 그들은 모두 참된 판단을 - 선악의 판단력, 분별력 - 하기 전에 육체의 사슬에서 풀려났다./…/세계가 갓 만들어졌을 무렵에는 부모에게 신앙이 있기만 하면 순진한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구원될 수가 있었다. 그 처음 시대가 지난 뒤에는 죄 없는 사내아이는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늘에 오를 힘을 그 날개에 얻었다. 그러나 은총의 시대가 다가온 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이러한 티 없는 아이들도 저 하계(limbo)로 넘겨졌다.' 논자 주 : 천상의 자리배열에 대해 설명하며, 구원의 조건에 대해 세 시기로 나누고 방법도 달리했다. '구원을 받는 아이들의 범주'라는 이 흥미로운 대목을 통하여 놀라운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가져온 지난일의 빛나는 은총이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아보는 것이 궁금증을 해소해줄 것이다. 〈히브리 성서〉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로부터 인간의 역사가 막이 올랐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시대에 이르자 지구상에는 유대민족을 비롯하여 수많은 민족으로 갈라졌으며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가 나름대로 번성하였다. 황하문명과 독립된 인더스문명과 아프라시아(Afrasia)접점지역에서 창조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을 합친 고대 4대문명과 또 하나의 최초의 고대문명으로 추정되는 장강(양자강)문명과 중남미의 안데스지역의 여러 고대문명이 인류를 선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민족은 그에 비해 미개하고 힘없는 작은 부족에 불과하였다. 그러함에도 신이 오로지 유대민족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신이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내린 「창세기 3: 17」의 수고(sorrow,`etseb,בצע)라는 명령을 이행하여 훌륭한 문명을 발전시켰다면, 오히려 그쪽이 신의 의중을 충실히 따랐다고 보아야한다. 신이 사람을 만들었으나, 불순종으로 '그 밖의 세상'으로 내쫓았지만, 궁상맞게 에덴동산만을 바라보며 지지리도 못살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신이 모두의 신이라면, 제 잘못에 그러한 것을 못사는 유대민족만을 측은하게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찌하여 수많은 다른 우수한 민족은 제쳐두고 유대민족에게만 신(하느님)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세계가 갓 만들어졌을 무렵임에도, - 아담에서 아브라함 때까지 - 신은 어찌하여 유대민족에게만 국한되었으며, 구원의 역사가 오직 유대아이들에게만 해당이 되었을까?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것은 유대민족의 창조신화는 다른 민족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이 창조신으로 믿는 것은 유대민족의 그것과는 다른 별개였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로 마감된 유대민족의 천지창조는 다른 민족의 천지창조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뜻한다. - 모세가 오경을 지었다. 창세기를 위시하여 오경에는 천지, 인간, 민족, 언어, 예술의 유래는 물론이고 정치, 사회상 등을 소상히 서술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유대민족을 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였음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원죄는 말할 것도 없다. - 그것의 연장으로 그 처음 시대가 지난 뒤의 구원도 유대아이들에게만 돌아가는 혜택이 된 것이다. '신에 대한 의식인 할례'는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으로 준엄한 명령(창 17:10)이며, 유대아이에게만 해당되었다. - '피 남편 모세(출 4:24-26)' 참조 - 단테의 주장을 그대로 나열하면, 기원전까지의 신(하느님)이란 유대인만이 믿고 따르는 신일뿐으로 다른 민족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 ⒂ 《莊子/內篇》「德充符」, '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 唯止能止衆止. 受命於地, 唯松柏獨也正, 在冬夏靑靑.' * ⒃ 아프라시아①지역에 건조화라는 극심한 자연환경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환경에서 거주지와 생활양식 모두를 바꿔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에서 처절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았던 메소포타미아와 고대이집트인들은 새로운 창조적인 응전을 불러일으켜 고대문명을 태동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② BC 25세기에 이르자 두 지역의 문명은 최고도로 발달하였다. 이 시기를 초기청동기 4시기(EBA Ⅳ, BC 2500∼BC 2250)로 불린다. 창세기 대홍수(Genesis Flood)가 발생한 해를 《성경》으로 기준해서 산출하면 BC 2458년이며, 이를 전후한 기간에 그들 사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양대 문명인 고대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살펴보자. 먼저 서남쪽으로 대략 1천Km가 못 미치는 곳에 위치한 고대이집트는 어땠을까? 고대이집트는 피리미드시대라 불리는 고왕국시대(BC 2686∼BC 2181, 3왕조-6왕조)의 5왕조(BC 2498∼BC 2345) 전체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특히 5왕조는 4왕조와 더불어 고대이집트에서 가장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던 전성기의 왕조였다. 5왕조 1대 우세르카프(재위 BC 2498∼BC 2491)왕에서 2대 사후레(재위 BC 2491∼BC 2477)->3대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재위 BC 2477∼BC 2467)->4대 솁세스카레(재위 BC 2467∼BC 2460)->5대 네페레프네(재위 BC 2460∼BC 2458)->6대 니우세르레(재위 BC 2458∼BC 2422)->7대 멘카우호르(재위 BC 2422∼BC 2414)->8대 제드카레(재위 BC 2414∼BC 2375)에 이어서 7대 멘카우호르왕의 사위인 우나스(재위 BC 2375∼BC 2345)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대홍수의 기간에 해당되는 5왕조의 기록에는 아쉽게도 어떠한 천재지변이나 대규모의 나일 강 범람은 기록된 것이 없다. 북쪽의 테베(Thebes)에서 왕조의 중심인 남쪽의 멤피스(Memphis)까지 통일된 고대이집트는 계속되는 번영을 누리며 그들의 역사를 찬란히 빛내고 있었다. 동쪽에 인접한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흐름은 어떨까? 유대민족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일대는 초기 청동기 2시기(EBA II, BC 2900∼BC 2700)의 개막과 함께 시작된 초기왕조도시기(初期王朝都市期,Early Dynastic city period, BC 2900∼BC 2334)가 초기 청동기 4시기(EBA Ⅳ, BC 2500∼BC 2250)까지 꽃피우고 끝나갈 무렵이었다. 특히 BC 25세기경에는 주석광(朱錫鑛)의 개발과 야금술이 크게 발달하여 청동기문화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더 강력해진 병장기의 등장은 각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군국주의화하여 무력충돌이 잦은 결과를 낳았다. 이 시대는 아놀드 토인비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란시대〉③의 시작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칼데아(Chaldea)의 수메르지역에서는 25세기 초부터 그 일대의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대부분 장악했던 아다브(Adab)의 강력한 지배자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 BC 25세기경에 대략 90년 정도 통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연대는 불명이다)가 다스렸으며, '강들의 사이(Mesopotamia)'지역이 크게 발전하던 번성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는 메소포타미아 중부이북지역에 정착하여 살던 아카드인들이 세운 키시(Kish)왕조가 날로 세력이 강해져 남부지역의 수메르 도시국가들을 줄기차게 위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수백 년간에 걸쳐 서로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며, 접경지역에서는 수시로 분쟁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끝내는 키시의 유력자이며 군국주의자였던 사르곤(Sargon)에 의해 BC 2350년경에 남부 수메르 지역의 도시국가는 차례로 멸망당했다. 창세기 대홍수에 관계없이 고대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두 문명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 ① 아프라시아(Afrasia) : 페르시아만 서안에서 대서양 동안까지, 그리고 이란∙아나톨리아∙시리아∙아프리카 북서부 고지의 남쪽 기슭에서 야만과 아빗시니아 고지의 북쪽 기슭과 열대 아프리카 삼림의 북쪽 연변까지이다. - ② 아놀드 J. 토인비, 1976, 《역사의 연구》「卷1 문명의 발생, 제 2부/C. 문명발생의 원인/Ⅱ. 생각할 수 있는 적극적 요인/(a). 인종과 환경/2. 환경」 - ③ 아놀드 J. 토인비, 1976, 상게서「卷1 문명의 발생, 제 1부/C-Ⅰ 문명사회의 調査/(b) 수메릭(Sumeric) 사회」 '수메르∙아카드 제국이 세계국가이던 당시에 선행하는 사상(事象)을 검토할 때 우리는 다수의 지방 국가 사이의 파괴적인 일련의 전쟁이라는 형태에서 〈동란시대〉가 있었다는 징후를 발견한다./…/이는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이 상호 투쟁을 거듭하여 모두 피폐(疲弊)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은 이란 고원 기슭의 구릉지대에서 침입한 만족(蠻族) 구타이(Gutaeans)에 의해 이 사회 발상의 본 고장이 짓밟히고 말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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