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
게시물 상세보기
가거도 편지
백승훈 2012. 11. 16. 오전 10:34
3806
백승훈 2012. 11. 16. 오전 10:34
3806
가거도 편지
곽재구
한 바다가 있었네
햇살은 한없이 맑고 투명하여
천길 바다의 속살을 드리우고
달디 단 바람 삼백 예순 날 불어
나무들의 춤은 더없이 포근했네
그 바다 한가운데
삶이 그리운 사람들 모여 살았네
더러는 후박나무 숲그늘 새
순금빛 새울음 소리를 엮기도 하고
더러는 먼 바다에 나가
멸치잡이 노래로 한세상 시름을 달래기도 하다가
밤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 한 몸 되어
눈부신 바다의 아이를 낳았네
수평선 멀리 반짝인다는
네온사인 불빛 같은 건 몰라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골프장의 주인이 되고
누가 벤츠 자동차를 타고
그런 신기루 같은 이야기는 정녕 몰라
지아비는 지어미의
물질 휘파람 소리에 가슴이 더워지고
지어미는 지아비의
고기 그물 끌어올리는 든든한 근육을
일곱물 달빛 하나하나에
새길 수 있다네
길 떠난 세상의 새들이
한번은 머물러 새끼를 치고 싶은 곳
자유보다 소중한 사랑을 꿈꾸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네
수수천 년 옛이야기처럼 철썩철썩 살아간다네.
늦은 밤 시집을 펼쳐 읽다가 나도모르게 '가거도 편지'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곽재구 시인의 시선 속에서 이상향으로 새롭게 태어난 가거도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섬입니다.
아침이면 중국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릴만큼 우리 국토의 최서단에 자리잡고 있는 가거도(可居島)는,
가히 사람이 살만한 섬이란 이름과는 달리
이틀에 한 번 밖에 배가 다니지 않는 세상과 동떨어진 외로운 섬이라고 합니다.
시를 읽다가 문득, 세상의 다툼이나 근심 걱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섬사람들의 소박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 이름다운 시를 그대 목소리로 들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시는 눈으로 들어와서 머리로 가고, 노래는 귀로 들어와 가슴으로 간다는 말이 있지만,
만약 그대 고운 목소리에 실리면 이 시는 아무래도 머리로 가지 않고 가슴을 적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가거도 편지를 읽는 동안,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거리에 놓인 대상과,
그 대상들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여 새롭게 빚어내는
무지개빛 희망이 주는 찬연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이 너무 팍팍하여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할 때,
자신의 삶이 스스로 살아내기보다는 살아진다고 느껴질 때 상상의 집을 짓고 유토피아를 꿈꾸게 마련입니다.
이상향으로 번역되어지는 유토피아는 원래 없는 곳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utopia)를 집필하면서 그리스어의 '없는(ou-)과 '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신조어를 만들었습니다.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 유토피아인 것입니다.
유토피아는 상상속에서나마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살고 싶은 곳을 만들어 위안받고자 한
무력한 인간의 상상 속의 낙원인 셈입니다.
옛사람들이 그려낸 이상향을 들여다 보면 '상상은 지식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사기에 나오는 열매를 따 먹으면 불로불사의 나무가 자란다는 삼신산이나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물에 떠내려오는 복사꽃을 따라가서 발견한 무릉도원,
전국시대 한나라 유가학파들이 주장했던 천지만물과 융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대동세계가 또한 그러합니다.
그 중에도 가장 나의 호기심을 잡아끄는 이상향은 뭐니뭐니 해도 산해경 속에 나오는 남류산입니다.
산해경(山海經)은 온갖 요괴들이 등장하는 요괴백과사전 같은 중국 최고의 지리서인데
거기에 '남류산'이란 이상향이 나옵니다.
남류산엔 천년 묵은 호박인 유옥과 같은 보물이 넘쳐나고
신령스런 배나무인 감화나 푸른 말 같은 불사의 존재들, 시육처럼 아무리 먹어도 고기가 줄지 않는 소가 있어
무위도식 할 수 있는 지복의 날들이 보장된 이상향입니다.
인간 세계의 온갖 걱정과 갈등, 두려움이나 고통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곳이지요.
여느 이상향과 다를 곳 없는 남류산이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삼추라는 짐승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삼추는 암수가 한 몸으로 되어 있는 자웅동체의 짐승입니다.
내가 삼추에 흥미를 느낀 것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바라고 누리고 싶은 꿈의 엑기스만 뽑아 만든 상상 속의 이상향에 무슨 연유로 삼추 같은 괴물을 살게 한 이유가 궁금해졌기 떄문입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여러 궁리를 해봤지만 확신을 가질만 한 답은 쉽게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란 노래를 무심히 듣다가 무릎을 탁 쳤습니다.
심수봉의 노래 속에 그 답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승의 삶이란 것이 한꺼풀 속을 들여다 보면 사는 동안 고뇌의 절반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너를 생각하는 게 나의 일생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었지요.
자웅이체의 태생적 그리움으로 아파하고 견뎌야 하는 사랑의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삼추라는 자웅동체의 괴물을 이상향에 그려 넣었을까 생각하니 그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듯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사랑의 힘을 믿는 이라면
삼추가 사는 남류산보다는 차라리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을 쫓겨난 이브의 뒤를 따라
오늘도 사람들의 거리를 떠돌며 그리운 사람을 찾아 헤매지 않을까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사랑의 힘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아침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빚으시길!
댓글 4개
김영호
2012. 11. 16. 오후 01:20
아름다운 글과 사진에 젖다 갑니다.
비꽃
2012. 11. 16. 오후 04:52
사랑의 힘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살아가는 이유가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백승훈
2012. 11. 16. 오후 09:49
고맙습니다. 김영호님, 행복한 날 지으세요^^
백승훈
2012. 11. 16. 오후 09:50
비꽃님, 사랑이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좋은 날 되세요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