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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로 맺은 사랑
오늘은 옛그림 한 점 골라 걸어두고 편지를 씁니다.
조선 중기의 '신들린 붓잡이'로 이름을 날렸던 김명국의 저 탐매도 속의 선비처럼 마음의 길을 따라 나서면 설중매 한 떨기 만날 것 같습니다. 수많은 꽃들이 다투듯 피어나는 봄날을 마다하고 찬바람 매운 눈 속에 피는 매화를 보면 그 고운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자연에 대한 경외감으로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게 됩니다.
기왕에 매화 이야기를 꺼낸 김에 오늘은 매화에 얽힌 퇴계 선생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퇴계 선생은 평생동안 매화라는 단일소재로 여든 다섯 제목 (85題)에 118편의 시문을 담은 퇴계매화시첩(退溪梅花詩帖)을 남겼을만큼 매화에 특별한 애착을 지녔던 분이었습니다.
그가 단양군수로 있을때의 일입니다.
여느 날처럼 하루의 공무를 마치고 처소에 들어서던 퇴계는 낯선 향내에 잠시 숨을 멈추었습니다. 어디서 나는 향기인가. 방안을 둘러보니 창 가에 낯선 매화 화분이 놓여 있고 화분 속엔 이제 마악 꽃을 피운 옥골빙혼의 매화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퇴계는 깊이 숨을 들이켜 매화의 청향을 가슴 깊이 흠향하였습니다.
잠시 만개한 매화에 다가가 꽃향기를 흠향하던 퇴계는 사람을 불러 매화분을 가져다 놓은 이에게 돌려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기별을 받은 두향이 잰걸음으로 달려와 퇴계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나으리,어찌 분매를 도로 가져가라 하시옵니까?\"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이런 뇌물은 받을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거라.\"
\"나으리, 예로부터 매화는 속기가 없고, 추운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 격조가 있습니다. 비록 뼈대는 말랐으나 정신이 맑고 운치가 있으며 북풍한설에도 곧은 마음을 굽히지 않으니 부디 이 매화와 더불어 심신의 안정을 유지하며 저희 고을을 잘 다스려 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네 마음은 알겠다만 고을을 다스리는 내가 백성으로 부터 까닭도 없이 뇌물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 네 마음만 받을테니 매분은 가져 가거라.\"
두향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습니다.
\" 이 매화는 제 어미가 생전에 키우던 것입니다. 어미와 사별한 후 어미를 대하듯 정성으로 제가 키워오다가 나으리께서 매화를 사랑하신단 소문을 듣고 이제야 주인을 찾은 듯 하여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인데 어찌 뇌물이라 하십니까? 부디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내가 매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찌 알았느냐?\"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 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두향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매화시 한 수를 또박또박 외웠습니다. 그 시는 퇴계가 단양군수로 내려오기 6년 전에 설중매를 보고 지었던 시였습니다.
\"나으리가 이 곳으로 내려오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시를 구해 읽으며 나으리가 매화를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리 매화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면 누가 제 어미가 남긴 분매의 주인이 되겠습니까?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퇴계는 더 이상 물리칠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단양기생 두향과 퇴계의 러브스토리는 매향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분매를 인연으로 각별한 사이가 된 두 사람은 풍광 좋은 단양의 산수를 거닐며 시화(詩話)와 음률을 논하고 인생의 즐거운 한 때를 보내었습니다. 매향과 더불어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봄과 여름, 가을을 보내는 동안 새록새록 깊어갓지만 두 사람의 달콤한 로맨스는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퇴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한지 10개월만에 단양 땅을 떠나야만 할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해 10월에 퇴계의 친형인 대헌공이 직속상관인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세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게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퇴계가 사표를 제출했기 때문입니다.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풍기 군수로 임명하였고 퇴계와 두향은 애달픈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퇴계가 떠나가자 두향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것이 단 10개월 동안이나마 모시던 퇴계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 여겨 아예 기적에서 물러 날 것을 결심하고 신임 사또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기적에서 면천된 두향은 오로지 퇴계만을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아갔습니다. 오매불망 퇴계를 잊지 못한 두향은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으나, 퇴계의 처지를 생각하면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인편을 보내 문안을 여쭙곤 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러 퇴계가 세상을 뜰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1570년 어느 겨울날, 퇴계는 방안에 매분을 가리키며 '매화에게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떴습니다. 퇴계의 임종 소식을 들은 두향은 스스로 곡기를 끊어 퇴계의 뒤를 따랐습니다. 두향의 올곧은 사랑을 생각하면 \"오동은 천년을 살아도 제 곡조를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한 조선 중기의 문장가였던 신흠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습니다.(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우리가 쓰는 지폐 천 원짜리의 앞면에는 퇴계의 초상과 함께 매화 꽃 20여 송이가 피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매화꽃을 손에 쥐고 생활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한 사람이 400여 년 전 퇴계에게 분매 한 그루를 선사한 관기(官妓) 두향(杜香)이였다 하면 견강부회일까요? 이래저래 청아한 매향이 그리운 아침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댓글 8개
步屧中庭月趁人(보섭중정월진인) 梅邊行繞幾回巡(매변행요기회순) 夜深坐久渾忘起(야심좌구혼망기) 香滿衣巾影滿身(향만의건영만신)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퇴계선생의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을 읊어 보았습니다
'매화에게 물을 주라' '오동은 천년을 살아도 제 곡조를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퇴계선생의 세상을 그려보는 마음과 두향의 올곧은 사랑에 다시금 삶의 바른자세와 지고지순한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게 합니다. 역사적인 이야기와 새롭고 신선하게 만나는 글감 속 고운 삶과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백시인님의 글감 오래 머물게 합니다. 깨우쳐 가는 하루하루에 작은 기쁨까지 보태주시니 고마운 마음 댓글 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 가득 웃음 가득 담고 사셨으면 합니다. 하루의 참된 깊이를 느끼게 하는 고운 글감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바로 위에 댓글을 올려주신 분처럼 저도 저 구절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추위 속에도 향기를 잃지 않는 매화를 닮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천 원짜리 지폐도 꺼내서 뚫어지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한 여인을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다는 소설가 한분을 떠올리게 됩니다. 기억 너머로 함께 할 수 없는 그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아마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 누군가를 생각하며 눈물 한 방울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는 사실 2012년을 마무리하는 날로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한 달이 남았지만, 어느 때보다 11월은 빠르게 지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하루를 1년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뭔가를 하면서 보냈고, 12월은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보낼 것입니다. 11월은 새로운 인연을 알게 되어서 기뻤고 소중히 생각하며 오래도록 좋은 인연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새로운 달 12월은 선생님께서도 어떤 날들보다 소중하고 행복이 넘치는 고운 날들 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재순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렇게 매화시로 화답해 주시니 글마당이 매향으로 그윽해진 것만 같습니다. 여일하시지요?^^
윤성완 선생님 여일하시지요? 다음 주에 제천 기행가는데 함께 가시면 두향이 얘기도 들려 드릴 것을... 많이 아쉽네요^^ 아무쪼록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한해 마무리 잘하세요. 저도 덕분에 알찬 한해 마무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느 드라마에선가 보니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은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직 오는 중'이라고 하던 주인공의 대사가 생각납니다. 비꽃님께선 11월의 마지막날을 한해를 마무리하며 알차게 보내셨군요. 12월 한달이 덤으로 생기신 셈이네요. 저는 오늘 인사동의 시낭송모꼬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12월에도 행복한 날들만 가득하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매화꽃에 얽힌 사연 참 아름답네요. 뭔가 올려놓고 돌아가는 마음처럼 차곡 차곡 쌓아가는 마음 . 비울줄아는마음. 아름답네요. 좋은시간 되시고 ,행복하세요
겨울 끝언저리에 가면, 매향 가지러 가고 싶네요. 아름다운 이야기에 잠시 머물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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