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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 낳은 명작
겨울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기승을 부리던 추위도 이제 한풀 꺾인 듯 습기를 품은 바람결도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혹한의 날이 이어지는 동안 잔뜩 웅크렸던 몸의 관절들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 싶어집니다.
오늘 편지 속의 그림은 제가 좋아하는 겸재(謙齋)·정선(鄭敾)의 독서여가(讀書餘暇)란 화제의 그림입니다.
사방관을 쓴 선비가 쥘부채를 든 오른손을 무릎에 받쳐 들고 왼손으로는 툇마루를 짚은 채 비스듬히 앉아서 마당에 놓인 화분 속의 꽃을 바라보는 모습이 더없이 평화롭게 느껴지는 그림이지요.
화제(畵題)가 '독서여가'인 것으로 보아 그림 속의 선비는 오래도록 책을 읽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툇마루에 나앉아 꽃을 완상하는 중일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책 속에서 성현의 가르침을 읽고 마음 흐뭇해져서 서책을 잠시 미뤄두고 마루로 나와
꽃을 보는 선비의 고요한 마음 풍경이 고스란히 읽혀집니다.
살짝 보이는 초가지붕 아래로 깔끔하게 정돈된 서가의 모습은 선비의 청빈함을 나타내고
문 사이로 보이는 우람해 보이기까지 하는 향나무는 꼿꼿한 선비의 기상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은일의 삶을 사는 선비의 한가로운 순간을 포착해 낸 이 그림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들어 있는 그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혹자들은 그림 속의 선비가 정선 자신을 투사한 그림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나처럼 그림을 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 속에 대신 앉힌다 해도 그리 탓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영조대왕의 그림 선생이기도 했던 겸재 정선의 이 그림이 들어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엔 특별한 사연이 들어 있습니다. 겸재에겐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는 사천 이병연이란 절친이 있었습니다. 눈만 뜨면 한데 어울리다가 겸재가 양화나루 건너편의 양천현감으로 발령이 나자 두 사람은 조석으로 볼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서로 시와 그림을 바꿔보기로 약속을 합니다.
후일 이 약조는 지켜져 합벽첩( 한 쌍의 벽옥처럼 뛰어난 시와 그림을 한 책에 합쳐 놓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경교명승첩입니다. 이 화첩엔 양천팔경과 한강변의 명승도들이 수록되어 있고 친구인 이병연으로 부터 받은 시찰(詩札)을 화제로 한 그림들이 실려 있습니다. 만약 겸재에게 사천이란 절친이 없었다면 진경산수의 진수를 보여주는 겸재의 명작들은 그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겸재와 사천의 우정이 낳은 명작이 경교명승첩인 셈입니다.
기이한 산천의 모습이나 안개 낀 풍경 같은 상상 속의 경치를 그린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의 산천을 직접 찾아다니며 실제의 풍경을 화폭 속에 담은 겸재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 시켰습니다. 같은 시대의 화공이었던 조영석은 '정선에 와서야 우리 산수화가 개벽되었다'고 했을 만큼 겸재는 그 이전의 조선 300년 산수화의 전통을 깨고 진경산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천재 화가입니다. 겸재의 작품은 경교명승첩 외에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등 우리의 산천을 몸소 발품을 팔며 자신의 시각으로 그려낸 진경산수의 명작들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리네트!
겸재와 사천의 합벽첩엔 못 미치단 해도 이렇게 적어내는 내 마음의 소회가 그대로 인해 비롯되었다 생각하면 새삼 그대에게 고마울 뿐입니다. 비 내려 마음 안섶이 젖기 쉬운 날, 마음 단속 단단히 하시어 뽀송뽀송한 하루 보내시길 빕니다.
댓글 2개
올려주신 그림은 저도 익숙합니다. 가만히 그림 속으로 들어가 저 곳에 앉아있고 싶습니다. 날씨가 춥기전에 양주의 어느 곳에 가서 나무로 된 마루 위에 그대로 누워있었던 적이 있는데 참 편안했었거든요. 대청마루에 누워있으면 하늘에 떠가는 구름도 보고 새소리도 들려올 것 같고, 계절은 푸르름이 더해가는 계절일 것 같아요. 겨울이 시작된지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저는 벌써 따뜻한 계절이 그립네요. 봄이 오면 손 맞잡고 벗이랑 꽃나들이 가고 싶네요. 비가 내려도 내린 눈이 다 녹을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비가 내려서 그런지 언젠가 제가 비사랑 카페를 운영할 때가 생각납니다. 비를 좋아하시는 분도 있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었는데, 아무튼 카페를 접고나서도 비가 내리면 제 생각이 먼저난다고 메일을 보내시던 회원분들이 생각나네요. 아무튼 비꽃은 피었고 비도 내렸고 혹시나 비 때문에 우울해하실 분도 있겠지만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겨울비는 싫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게 보냈으면 합니다. 이럴 때 감기에 걸리시는 분이 더 많더군요. 옷도 따뜻하게 입으시고 남은 오후도 즐거운 마음으로 보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 '독서여가'는 오랜 날을 제 블로그를 지키고 있는 그림입니다. 좋은 책을 읽으며 마음공부를 하고 시간이 나면 꽃을 완상하는 여유로움에 대한 개인적인 부러움과 바람이 들어 있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 그림이 탄생하게 된 까닭이 친구간의 우정에 기인했다는 점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람살이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이렇게 멋지고 근사하게 우정을 나눌 수도 있구나 싶어 경이로운 생각마저 들기도 했으니까요. 타고난 재주에 따라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다면 내게도 사천과 같은 벗이 있다면 나도 보다 좋은 글을 쓸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면서요. 비 오는 날은 마음이 차분해져서 글쓰기에 좋은 날입니다. 생각이 가즈런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져서 생각을 모으기 쉬우니까요. 정성스런 댓글 고맙습니다. 비꽃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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