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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있어 사는 게 서럽다 해도

백승훈 2012. 12. 25. 오후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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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네트!
아기 예수의 은총이 누리에 가득한 성탄일입니다. 
그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내 생각의 물길을 따라 만상(
萬象)이 흘러오고, 만상(萬想)이 또 흘러갔습니다.
그 짧지 않은 시간을 건너오는 동안 달이 바뀌고 우리는 어김없이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새 캘린더를 걸며 새로운 소망을 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나이에 대해 무심해지고 마음에 평안을 얻어가는 것이 서른을 넘어서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철학적 소설 '삼십세'에서 '서른'을 두고 '모든 묵은 것들에게 퇴거 신고를 하고 익명의 풍요로운 도시 로마를 향해 떠나느냐, 아니면 세상에 대해 겸허해져서 하나의 의무를 찾고 봉사를 자청한 나머지 한 그루의 나무를 심거나, 어린애를 만드느냐.\"의 세 가지 경우의 수를 앞에 둔 나이라 했습니다.

 
떠남, 정박, 출산 중에 어느 것을 선택했든 우리는 그 시간들을 지나왔고, 그 지난 세월 속에서 스스로 터득한 만고불변의 진리인  무상(無常), 이 세상에 변하지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데서 오는 마음의 여유가 우리를 나이 앞에서 무심해지게 했을 것입니다. 나이가 곧 시간이고,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걸 인정하고나면 시간의 흐름을 즐기고 자신의 변화를 편안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삶과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니까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하나 뿐이라면 그대와 나는 첫 편지를 쓰던 날에서 지금에 이르는 동안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아침마다 내가 건넨 많은 말들은 얼마나 그대 가슴으로 흘러 스미었을까요? 우리는 얼마나 더 친밀해지고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누군가는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날마다 닦아내도 어김없이 내려 앉는 일상의 먼지처럼 우리의 시간들도 그렇게 쌓였을까요?
참으로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날마다 그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간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대에게 편지를 쓰면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에 뿌리가 닿아 있다는 말을 곱씹으며 까닭모를 슬픔에 서러워진 적도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밭이 환해지던 사람, 목소리만 들어도 세상의 그늘이 반쯤은 사라지게 만드는 사람, 한 하늘 아래 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하게 해주는 사람이 그대였습니다.

 
리네트!
지금껏 그래왔듯이 늘 그 자리에 계십시오. 

수시로 허방을 짚기 일쑤지만 그래도 잠시라도 그대가 되어 보는 일, 그대의 마음이 되고 그대의 처지가 되어 그대의 슬픔을 덜어주고 아픈 상처를 보듬어 주고픈 이 마음을 나무라지만 마십시오. 설레는 마음으로 첫편지를 쓰던
그 순정한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서로의 생을 바라보고 지켜주며 따뜻하게 감싸주는 친구이고 싶으니까요.
가끔은 그대 있어 산다는 게 서럽다 해도 이 설움 또한 내게  넘치는 호사임을 내 알기에.
 

사랑,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 김훈의 '바람의 기별' 중에서-
오늘도 좋은 하루!

댓글 4개

문태성 2012. 12. 25. 오후 02:21

백선생님 은덕 '사랑'을 새삼 음미해 보았습니다!

비꽃 2012. 12. 25. 오후 07:28

눈이 내려 세상에 쌓이듯이 시간도 정말 쌓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좋은 인연과의 추억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씩 쌓여가듯이 말이죠.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 항상 희망의 빛을 선사해준 고마운 인연을 생각하게 됩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사랑임을 알게 되었고 아침 해가 뜨는 것처럼 늘 활기찬 모습이 떠올려지는 걸 보면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겁답니다. 그러니 전 하나도 슬프거나 서러운 생각이 들지 않는답니다. 하얀 눈만큼 포근한 마음이길 바랍니다.

백승훈 2012. 12. 26. 오전 10:45

문태성님 고맙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2012년 아름답게 마무리 하시길 빕니다.^^

백승훈 2012. 12. 26. 오전 10:49

흐르거나 쌓이거나 우리가 시간 속을 지나온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요. 비꽃님의 말씀처럼 나를 스쳐간 인연에 감사하고, 사랑의 기억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슬프거나 서러운 생각마저도 시간이 지나고나면 아름다운 생의 한 페이지가 된다는 것을 믿으면 세상은 훨씬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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