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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백승훈 2012. 12. 31. 오전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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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네트!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입니다.
마지막 잎새 같은 묵은 캘린더를 떼어내고 새 캘린더를 바꾸어 걸며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아, 벌써 일 년!이었습니다. 
바람벽에 쾅쾅 못질을 하고 새 캘린더를 걸며 호기롭게 세웠던 그 많은 계획들은 얼마나 이루었는가. 
스스로에게  묻고 나면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나는
올 한 해도 하릴없이 흰 머리 숫자나 늘리며 생의 잔고만 축낸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간간히 눈소식이 들려오던 초겨울,
들길을 걷다보면 한해살이 풀들의 씨앗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눈에 띄곤 햇습니다.  
그 작은 씨앗들이 바람에 떠가는 것을 보면 그네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그 씨앗 하나를 허공에 띄우기까지 그네들의 생을 적시고 흔들었을 수많은 비와 바람의 시간들,
그 숱한 시련을 이겨내고 세상 속으로 자신의 열매를 띄워보내는 그 당당함과 마주하면 세상에 불평만 하며 살아온 
내 지난 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곤 했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한해살이 풀처럼 세상에 내어 보일  실한 열매 하나 없이
유난히 낙과가 많았던 지난 삼백 예순 날이 낙엽처럼 흩어진 것만 같아 쓸쓸해집니다.
가족이나 이웃에게도 살갑게 대하지 못했고 내 자신에게도 충실하지 못했다는 때늦은 후회와 
스스로 살아내기보단 세상에 등 떠밀려 살아진 세월이란 자괴감에 찬 대리석에 이마라도 찧고 싶어집니다.
하여도 곰곰 되짚어 보면 그리 헛된 세월만은 아니었습니다.
고단힌 일상의 시간을 쪼개어 틈틈이 여행도 다녔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시간의 빈틈마다  마음에 허기를 메울 요량으로 잡문이나  끄적이며 살았지만
마음에 드는 몇 편의 시를 건지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고마운 일은 그대라는 참 좋은 벗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리네트!
그대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많이 행복했습니다.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밋밋하던 나의 일상에도 생기가 돌고 내 삶의 무늬들이 한결 윤기나고 더 깊어졌습니다.
그동안 내가 띄운 편지들이 그대에게로 가서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실은 편지를 쓰는 동안 내 스스로 위로받은 적이 더 많았습니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날마다 그대에게 편지를 띄우는 일은 여기서 멈추려 합니다.
비록 편지는 여기서 끝난다 해도 내 마음의 풍향계는 언제나 그대를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내 마음의 물결은 그대 향해 흐르고 항상 그대를 응원할 것입니다.  

제법 오랜 날을 들꽃들을 보면서 내가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들꽃은 어울려 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들꽃들은 밥풀 같은 작은 꽃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큰 꽃 모양을 이루기도 하고 주변의 다른 꽃들과 어울려 천상의 꽃들판을 연출하기도 하지요. 
자기 절제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어울림'의 전제 조건이라면 들꽃들은 그 어울림의 미학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
들꽃들은 자신을 돋보이려고 허장성세를 하거나 자신의 화려한 꽃빛으로 남을 기죽이는 일은 하지 않거든요. 
사람살이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룰 때 우리 사는 세상도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될테니까요.
이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타인을 향해 세웠던 날 선 생각들을 거두고
우리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어야겠습니다.
그대와 내가 낯선 타인으로 만나 이렇게 친밀해졌듯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손부터 마주 잡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서로에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임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그대가 있어 나의 생이 아름다울 수 있었노라고.
그대로 하여 나의 한 해가 참 따뜻했노라고 고마운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리네트!
한해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남들이 샘날만큼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길 빕니다.
안녕히 

댓글 6개

비꽃 2012. 12. 31. 오전 11:11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신 글들이었습니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슬프게 들리지만, 2012년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전 고마운 인연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작은 관심이 저에게 힘이 되었던 것처럼 선생님의 편지글은 충분히 힘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날들이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봉길 2012. 12. 31. 오전 11:21

하나의 아름다움이란 시작과 끝이 있음에 그 존재 의미가 분명하다고 합니다. 매듭 지을 수 있는 결단이 분명할 수록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을 테고요. 함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총총...

아침향기 2013. 01. 01. 오후 08:34

마지막이란 말만으로도 눈물이 맺히네요^^ 매일 아침 조간 신문에 연재 되는 소설을 읽는 느낌으로 시인님의 편지를 접할 수 있어 행복 했어요.. 그동안 작은 스마트폰으로 시인님의 글을 보며서 사랑은 누구나 아름답구나!! 추억은 소중하구나!! 생각 했습니다^^ 새해에는 또 다른 테마로 아름다운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백승훈 2013. 01. 02. 오전 10:08

세월이란 강물 같아서 어느 한 부분을 떼어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인데 사람들만이 시간에 눈금을 그려넣고 의미를 새깁니다. 하여도 새해가 밝았으니 마음 속에 희망 하나쯤 품어보는 것은 괜찮을 듯 싶습니다. 새로운 궁리를 하느라 편지쓰기를 멈추었지만 이곳에서 날마다 글을 쓰던 날들이 그리워질 것입니다. 언제나 희망의 빛이 가득한 날들이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백승훈 2013. 01. 02. 오전 10:10

고맙습니다. 김봉길 선생님. 한 매듭을 지나면 또다른 매듭을 만나게 되겠지만 그 또한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날 되십시오.

백승훈 2013. 01. 02. 오전 10:12

아침향기님이 그리 꼼꼼히 읽어주셨다니 영광입니다. 날마다 편지쓰는 일은 멈추었지만 형편되는 대로 다른 글로 찾아뵙지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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