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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러브레터 3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은 내일을 베일로 가려 놓은 것이라 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내일에의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미래가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스포일러가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키듯이 미리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면 우리들의 내일은 심심하고 재미없게 될 테니까요.
날마다 내 안에선 남해의 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밤마다 동백꽃 피는 섬으로 가는 꿈을 꾸었지만 끝내 동백열차에 몸을 싣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은근한 바람과는 달리 그 곳에 가지 못한 채 봄날이 저물어 갈 즈음 그녀에게서 온 편지엔 진한 커리 향이 났습니다.
\"누군 저 나이에 안 예뻤나!\"
스무 살짜리들을 보며 중년들이 입을 모았다
난,
나는 지금 제일 예쁜 거라고 했다
다들 하하 웃었지만
농담 아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앞날이 훤한
못생긴 내 청춘이었다
-황인숙의 詩<카페 마리안느> -
혹시 언젠가 편지 속에 적어 보내주셨던 저 시를 기억나시나요?
놀라지 마세요.
저는 지금 저 시 속에 나오는 카페 마리안느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랍니다.
단짝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서울에 왔던 저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당신의 편지 속에 들어 있던 황인숙의 시였습니다. 친구의 결혼식이 끝나고 홀로 남겨졌을 때 예매한 열차 시간까지는 세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습니다.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지 몰라 고민에 빠졌을 때 ‘카페 마리안느’가 생각났습니다.
마리안느를 떠올린 스스로를 대견해 하며 대학로의 골목을 걸으며 사랑이란 항상 낯설지만 실은 가장 익숙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했던 어느 날의 당신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뜬금없이 떠올린 그 생각도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간직했던 내 안의 상처이거나 홀로 꿈꾸었던 소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은 당신의 편지를 받던 그날부터 나는 이따금 카페 마리안느에 앉아 있는 나를 상상하곤 했으니까요.
카페 마리안느는 1985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시인이자 화가인 이제하 선생이 2003년 평창동에 열었다가 대학로로 옮겨 앉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카페 이름은 1960년대 바비 인형 같은 외모와 십대라는 나이와 맑은 목소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국 출신의 가수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카페 주인 이제하 선생이 그 가수를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부른 'This Little Bird'는 저도 즐겨듣는 노래 중의 하나입니다.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을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그냥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만약 내가 전화를 걸면 당신은 나를 만나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시간을 낼 게 분명하고 나는 곧 기차를 타러 가야 하는데 공연히 당신을 번거롭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혼자 음식을 시켜 먹는 일은 조금 쓸쓸한 일이긴 하지만, 상상으로 맞은편 의자에 당신을 앉혀두고 치킨커틀릿 커리를 주문했습니다. 푹 끓인 카레와 밥, 그리고 바삭하게 잘 튀겨낸 치킨가스 두 조각. 잘 숙성된 커리향을 맡는 순간 유럽의 어느 농가에 초대를 받은 것처럼 행복해졌습니다.
맛있게 음식을 먹고 디저트로 애플주스를 마시는데 마침 스피커에서 이제하 선생의 모란동백이 흘러나왔습니다.
...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 세상은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래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노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탁자 위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땐, 그때는 꼭 당신과 함께 오고 싶습니다.
댓글 4개
점심 먹으면서 창밖을 보니까 눈이 내렸어요. 이 동네는 눈이 내리면 뉴스거리지요. 겨울이라도 워낙 눈이 안 내려서요~ 백승훈님은 치킨커틀릿-푹 끓인 카레와 밥, 그리고 바삭하게 잘 튀겨낸 치킨가스, 잘 숙성된 커리향을 맡으면서 유럽 어느 농가에 초대받으신 것처럼 행복하셨다구요? 디저트로 애플주스도 마시구요? 저는 파전에 김, 김치, 멸치가 있는 도시락 까먹고 후식으로 귤 2개 까먹고 사탕 2개 까먹은 다음, 백승훈님의 연애편지를 까먹었습니다. 이 포만감, 열심히 머리와 몸을 써야겠습니다.
동백섬님 계신 곳이 부산이신가 봅니다. 눈이 내리면 뉴스가 되는 곳이라는 말씀을 듣고보니 언젠가 그 곳에 사는 친구가 눈 좀 아이스박스에 담아 택배로 부치라던 농담이 생각납니다. 도시락에, 귤과 사탕까지 괜찮은 점심을 드셨네요.한데 커리를 먹은 것은 제가 아니에요 흑.
낯익은 어느 겨울날 약속으로 꿈으로 가득 멀고 먼 인생이여 추위를 잊은 동백 영혼의 시 가만히 퍼져가는데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백승훈님
고맙습니다. 김현배님, 동백꽃 피는 계절이 오면 남도의 섬을 향해 달려가던 마음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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