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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러브레터 4
카페 마리안느에서 쓴 그녀의 편지를 받고 나는 그녀가 다녀갔을 그 길을 마음으로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녀가 타고 갔을 지하철과 카페에까지 이르는 골목길과 그녀가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하고 애플주스를 마셨던 테이블을 머리속에 그려보는 동안 까닭모를 슬픔이 마음 한 켠에 차곡차곡 쌓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쓰는 그녀의 마음자리를 짚어보다가 그녀가 항상 가방 속에 넣고 다닌다는 그림엽서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답장을 쓰지 않으면 영영 못 쓸지도 모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 편지 한 통을 썼다. 편지를 쓰다가, 내가 이곳에 온 지 겨우 3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곳, 예를 들어 시골에서 같으면 하루나 다름없는 날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몇 해가 지나간 느낌이다. 더 이상 편지를 쓰는 일도 그만두어야겠다. 내가 딴 사람이 되겠다는 것을 누구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까? 만일 내가 딴 사람이 된다면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닐 것이다. 이전의 나와는 어딘가 좀 다른 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는 사람이 없게 된다. 미지의 사람들에게,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릴케의 <말테의 수기> 중에서 -
문득 한 번도 써 본 적은 없지만 항상 몇 장씩의 그림엽서를 지니고 다닌다는 당신의 작은 손가방 속이 궁금해집니다. 만약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 엽서 속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햇살이 가득한 바랑즈빌의 프티앨리 절벽이 그려진 모네나 마티스의 댄스, 샤갈의 동화같은 그림과 칸딘스키의 기하학적 그림들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도 당신은 그런 엽서들을 내 앞에 꺼내 놓으며 그냥 '낭만적 포즈'를 위한 하나의 소품이라고 말한 적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엽서들이 우표 대신 향기로운 꽃잎을 달고 당신을 떠나지 못한 것은 직사각형의 작은 엽서 속에 들어 있는 그림들이 제각기 담고 있는 의미와 함께 당신을 열어 보일 누군가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란 것을 난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릴케까지 불러내어 엽서를 띄우지 못하는 까닭에 대해 길게 부연설명을 하는 동안 나는 눈금 하나를 넘어서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마냥 까딱거리는 배터리 수명이 다 된 벽시계의 초침을 바라볼 때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뭔가 그럴싸한 장광설을 늘어놓아 내가 마치 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지만 릴케의 말처럼 딴 사람이 되어버린 나를, 이미 나를 알지 못하는 미지의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필요가 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김이 빠지고 맥이 풀려버린다 했던가요? 그래서 그림엽서를 부적처럼 손가방 속에 넣고 다니지만 아직 누구에게도 그 멋진 그림들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딴 사람이 아닌, 더 이상 딴 사람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될 때, 그때가 되면 누구나가 다 아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엽서의 크기로 담아 띄울 수 있을 때까지는 잠시 엽서 쓰는 일은 유보하기로 했다고 했었지요. 지금도 당신의 손가방 속엔 그 멋진 그림엽서들이 여백으로 남아 있을까요? 아니면 지금쯤 누군가에게 닿아 하나의 변치 않는 의미가 되었을까요?
당신의 편지에선 오래된 책 냄새 같은 미묘한 먼지 냄새가 맡아집니다. 가만가만 소리내어 편지를 읽다보면 슬픈 휘파람 소리와 낮은 파도소리가 들립니다. 슬픔에서도 향기가 나는 당신은 이백년쯤 걸어 내게로 왔을
것만 같습니다.
댓글 2개
릴케의 말테의 수기 생동하는 의지를 가진 그 사람은 한 이백년의 세월을 가로지르며 깊고도 깊은 향기에 취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음을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백승훈님
감사합니다. 김현배님.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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