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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목(세월은 바람같이) 2편
김병국 2015. 12. 22. 오후 12:53
4034
김병국 2015. 12. 22. 오후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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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무과장 주낭걸, 준석과는 아주 막연한 어릴 때 친구였다.
이름 때문에 준석은 그냥 주과장이라고만 불렀다.
준석은 회진이 끝난 이 시간엔 늘 그러하듯 오늘도 3 층 그의 방 창가에 서서 첫눈 내리는 뒤뜰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덩치 큰 한한섭 박사가 준석의방에 들어서다말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준석을 보고는 가만히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학교 동기였던 한섭은 준석과 절친한 친구로 이 병원을 지을 때 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던 친구였다.
한섭은 환자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대단했다.
원장실 바로 옆방에 있는 짧은 생머리에 소녀 같은 윤지혜도 같은 시간에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젖어 있었다.
지혜는 내과와 소아과를 겸해서 보는 현대 의학을 전공한 의사로서, 준석이 병원을 개원하고 부터 이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지혜는 10여 년 전 사고로 남편을 잃고, 그 동안 혼자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으나, 딸 은희의 병을 고쳐준 준석에게 만큼은 아주 각별했다.
그러나 준석은 몇 년 전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어 윤지혜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준석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또한 흠모하고 있었지만, 가정이 있는 그였기에 그저 오빠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흩날리던 눈은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고, 금새 온듯한 눈인데도 마른 나뭇가지와 파릇한 향나무 위에도 소복히 눈이 쌓여 있었다.
뒷뜰 연못가에 빙 둘러 서있는 잎 잃은 수양버들은 바람 따라 흔들고 있었다. 연못 한 가운데 서 있는 성모 마리아 상도, 모두 하얗게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준석의 우수에 찬 시선은 허공에 머물고 준석은 좀 전 풀뿌리 의 여운을 느끼며 습관적으로 창문을 열었다.
태풍이 이렇게 오는가 싶게 찬 공기는 준석을 휙 에워쌌다.
바람을 타고 날아든 눈송이들이 준석의 얼굴에 와서 닿고는 금새 녹아 버렸다.
짧은 순간에 차고도 상쾌한 느낌이 마치 전기가 통하듯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눈송이를 기다려 보지만 한번 날아든 눈송이는 더 이상 날아 들지 않았다.
갑자기 준석의 뇌리엔 좀 전에 보았던 그 나무뿌리의 향이 묘한 기분과 동시에 절벽과 오두막이 영화 장면처럼 떠오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가슴이 싸 해지는 기분?’
'아! 언젠가도 이런 느낌이.......'
준석은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눈을 지레 감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가물거리던 그의 기억 저편에서 온갖 잡다한 일들이 일출의 형상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정인? 정인?’
준석은 몇 번이고 되뇌었다.
“정인아!”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그리움은 화산이 폭발하듯 준석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으 아 ! 정인아---“
준석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이상한 괴 소리로 내 질렀다.
마침내 그가 잊어 왔던 몇 년 전의 아름답고 가슴아파하던 추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초점 잃었던 그의 눈은 독수리가 먹이를 쫓듯 광채를 발하고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녀와 마지막 여행을 떠났던 태국 파따야 해변이 떠오르자 갑자기 책상 쪽을 쏘아보더니 한달음에 걸어가 거칠게 서랍을 열어 젖혔다.
서랍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소도구들이 일시에 흐트러지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움켜잡았다.
그의 손에선 파란 잉크색 싸파이어가 '반짝' 하고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여인을, 이렇게 감쪽같이 잊어버릴 수 있었다니......
그의 잠겨진 가슴속에서는 한없이 울고 있었다.
그녀와의 추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자 한동안 그렇게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있었다.
교통사고로 잃었던 기억이 기적같이 되살아나자 그는 그만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허탈한 기분으로 기억저편에 숨어있던 추억들을 더듬으며 그녀와의 가슴아푼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1990 년대 초 그 당시 준석은 서울 근교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었다.
12 월 둘째 토요일 오후, 막 퇴근을 한 준석은 그의 집 거실 소파에 앉아 T V 중계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용평 스키장에서 녹화로 하는 스키 경기를 그는 관심 있게 보고 있었다.
선수 한 사람이 활강(滑降)을 하다 그만 수십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다리와 목에 부상을 입었는지 들것에 들려 나가는 광경을 보고 준석은 자기의 아픔인양 미간을 찡그렸다.
그도 어린 시절 스키를 타다 다리가 부러져 병원신세를 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석은 수원에서 국민학교 (초등학교) 를 다녔다.
그는 좀 마르긴 했으나 운동신경이 남달리 발달하고 힘이 강해 국민학교 시절 운동회 때마다 반에서 늘 대표 선수로 뽑혀 활약하곤 했었다.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을 때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영락없이 쫓아가 혼내 주었으며, 약한 아이를 못살게 구는 장난꾸러기들은 그에게 항상 혼이 나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의협심도 강한 그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 늘 군림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국민학교 4 학년 때 일이었다.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아이들은 목마를 만들어 그를 태우고, 가방은 그의 조수 격인 낭걸이가 들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으시대며 등교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광경을 목격한 그 아이들 중의 한 엄마가 학교까지 쫓아와 선생님께 준석을 징벌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의협심이 강한 준석을 남달리 귀여워했던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끼리 하는 장난을 너무 참견하는 게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화가 난 그 아이 엄마는 준석의 집까지 찾아가 준석의 엄마에게 항의하며 큰소리를 치고 돌아 갔다.
그런 광경을 담벼락 뒤에 숨어서 몰래 훔쳐보던 준석은 엄마에게 붙들려 들어갔다.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엄마는 말씀하셨다.
\"약한 사람은 도와줘야지. 훌륭한 사람은 절대 힘으로 다스리지 않는단다. 너는 분명 이다음에 큰사람이 될 거야\"
의당 야단맞을 줄 알고 긴장했던 준석은 뜻밖의 타이름에 감명을 받고 그 후론 힘으로 남을 부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약한 아이들은 점점 준석의 주변에 모여들게 되었다.
커다란 왕 눈깔사탕을 한 봉지 사서 주낭걸이가 아이들 줄을 세우고 준석이 하나씩 나눠 줄 때는 그는 아이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준석의 옆엔 늘 주낭걸이 있었고, 그는 준석의 일이라면 자다가도 뛰쳐나오는 둘도 없는 불알 친구였다.
주낭걸이의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늘 취해 있었다.
술주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주낭걸이의 어머니는 온몸에 멍 가실날이 없었다.
주낭걸이의 어머니는 이마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고 그 흉터는 술에 취한 그의 아버지가 던진 솥뚜껑에 맞아서 생긴 자국이라고 했다.
그래도 그 때는 누구 하나 간섭을 못하는 남정네의 행패를 묵묵히 참고 살아야 하는 시절 이었다.
동네사람들은 그저 불쌍해 동정만 할 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동네 사람들은 낭걸이네 집을 부를 때는 뚜껑이네 로 불렀다.
그러한 가정에서 자란 낭걸이는 착하긴 했으나 매사에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김장철이 되면 준석의 집 앞 공터에는 늘 무와 배추가 무더기로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그 때 김장철에는 매우 추워서 밤에 얼지 말라고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무나 배추더미를 싸매 두곤 했었다.
달빛이 어스름 할 때는 동네 꼬마들이 나와 술래잡기를 하는 재미로 아이들은 저녁도 굶은 채 놀이에 취해 있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무나 배추꼬리를 서리해 먹곤 했었다.
마땅한 놀이 시설이 없었던 그 때는 무와 배추꼬리 서리를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더 없이 짜릿하고 스릴 있는 놀이였다.
그런 놀이를 하기 위해선 아이들을 불러모아야 하는데 그런 일은 늘 낭걸이가 도맡아서 했다.
한때는 여기저기 배추 꼬리를 베어 모아둔 것이 커다란 함지박에 하나 가득 쌓였었다.
그만 배추 장수에게 들켜 준석이 엄마는 그 해 겨울 꼬리가 잘린 뭉그러진 배추로 김장을 해야 했다.
낭걸이가 준석을 따르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또 있었다.
'낭 낭 낭걸이의 불알은 바람도 안 부는데 덜렁 덜렁'
낭걸이의 이름도 우스웠지만 성격이 착하고 겁이 많다 보니 자연히 동네아이들은 낭걸이의 이름을 넣어 노래를 부르며 놀려 됐다.
아무리 착하고 힘이 없는 낭걸이지만 노래를 들을 적마다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여러 명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 건너 우물가에 사는 철식이가 골목 어귀에서 낭걸이를 보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낭 낭 낭걸이의 불알은 바람도 안 부는데 덜렁 덜렁'
철식은 모둠발을 뛰며 노래를 부르더니 낭걸이 옆에 와서는 혓바닥을 “낼름” 하고 지나갔다.
참고 있던 낭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철식이를 쫓아가 닥치는 대로 치고 박고 물어뜯었다.
낭걸은 여태 참았던 분풀이를 철식에게 다 퍼붓고야 말겠다는 듯 씩씩거렸다.
철식은 낭걸이에게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며 잉잉 울면서 두 살 위 형인 철민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 형제는 낭걸이를 흠씬 두들겨 패 만신창일 만들어 놓고 으시대듯 떡 버티고 서서 엎어져 있는 낭걸이에게 말했다.
\"너 한번 더 철식이를 건드리기만 하면 그 땐 죽어!\"
철민은 주먹을 불끈 쥐고 낭걸이 코앞에 내밀었다.
누나 심부름으로 꽈배기 한 봉지 사들고 골목으로 들어서던 준석은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준석은 평소에 철민이가 동네아이들을 못살게 군다는 말을 들어 왔지만 나이가 두 살이나 위고 덩치도 커서 벼르고만 있었던 참이었다.
\"야, 왜, 비겁하게 둘이서 덤비냐 ?
준석은 꽈배기 봉지를 땅에 던지듯 내려놓고 낭걸이를 두둔하고 나섰다.
\"어라, 넌 뭐야. 쪼끄만 놈이 까불어.\"
철민은 준석에게 다가가 툭 밀치며 말했다.
“형 ! 형” 동생 철식은 형 철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한쪽으로 끌고 갔다.
\"형, 재는 준석이야. 힘이 얼마나 센지 몰라. 우리 반에서 이거야, 이거.\"
철식은 준석이가 보지 못하게 몸으로 가리며 엄지손가락을 형에게 보이며 말했다.
\"쪼꾸만게 쎄면 얼마나 쎠. 내가 혼내 줄게.\"
\"형은 쨉도 안 되는데...\" 철민은 형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너는 두고만 봐.“
철식의 팔을 뿌리치며 철민은 준석에게 다가가 닭싸움을 하듯 툭툭 손으로 가슴을 밀치며 시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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