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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목(세월은바람같이) 4편
김병국 2016. 01. 03. 오후 01:00
4061
김병국 2016. 01. 03. 오후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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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가게죠?\"
\"아닙니다 전화를 잘못 하셨네요. 가정집입니다.\"
준석은 가끔 이런 전화가 자주 오기에 전화번호를 바꾸겠다고 하면서도 그럴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아내인 경숙이 해주길 바라지만 아내인 경숙은 얼마 전 뺑소니 교통사고로 이미 이세상사람이 아니었다.
사고조사를 하던 중 타박상이 있었지만 사인은 뺑소니 차량 때문이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준석은 경숙의 시신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아 별도의 사체부검은 하지 않았다.
억울하게 당했다면 한을 풀어주는것이 도리라고 후회도 해 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쌀가계 아주머니를 찾는 의문의 전화 한통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저 장난전화 겠거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혹시 오늘도 쌀가게를 찾는 전화가 교통사고와 무순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전화 속 남자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듯도 한 강한 쇠소리의 음색의 변조된 목소리 같았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실 때 집안의 장녀인 경숙에게 많은 돈을 상속했다고 들었는데 처가 집에서 잘 처리 했겠지 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그런 일과 무순연관 이라도 ...
준석은 눈길을 떠나면서 다른 생각은 하지말자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눈이 올때는 아이들과 온가족이 마당에 나가 눈싸움도하고 눈사람도 만들며 즐거운 날을 보냈었는데 오늘 같은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는 아내의 빈자리가 그립고 그리웠다.
간사한 인간의 감정이 함박눈이 너무 센티하게 만들고 있었다.
전화벨이 또 울렸다.
\"여보세요.\" 또 쌀가게를 찾는다.
준석은 가만히 들어보니 아까 그 목소리라고 생각되어 얼른 전화기에 연결된 녹음작동을 시키고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려고 이런 말 저런 말을 시켜보았으나 그쪽에서 눈치를 챘는지 철커덕 끊어버렸다.
시간이 너무 늦어지면 위험할 것도 같아 서둘러 전화를 자동응답용으로 돌려놓고, 종이를 꺼내 학원에 간 큰딸 연주에게 메모를 남겼다.
'연주야! 아빠는 잠시 강원도에 갔다 오마.‘
아빠 친구 한섭이 아저씨 문병도 할 겸 진부까지 다녀오마.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아빠가 다녀와서 눈사람 만들자.
눈사람에게 입힐 옷도 막내이모에게 꺼내 달래서 준비해 두어라.
막내이모가 곧 오겠지만 아빠가 찌개를 맛있게 끓여 놓았으니 연지가 피아노학원에서 돌아오면 먼저들 식사해라. 연지를 잘 보살펴 줘서 아빠는 네가 무척 대견스럽단다.
그럼 아빠 잘 다녀오마. 연주를 사랑하는 아빠가.‘
준석은 연주 책상 위 유리 속에 끼워 놓은 엄마랑 같이 찍은 가족사진이 가리지 않게 쪽지를 올려놓았다.
준석의 절친인 한한섭은 이곳 한방병원에 오기 전에 종합병원에서 근무를 하던 중 일시적으로 몸이 좀 쇠약해져 열흘 전 병가를 내고 강원도 진부에서 요양 중이었다.
준석은 그런 소식을 듣고도 시간을 낼 수가 없어 가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꼭 가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들은 서로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일은 늘 같이 의논하곤 했었다.
차를 타기위해 현관문을 나서니 온통 눈으로 거리는 어두워 있었다.
때 이른 가로등 불빛에 비친 담장 위에 수북이 쌓인 눈에 시선을 주며 하얗게 변해버린 동네의 조화로운 풍경이 준석을 어린 동심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골이 깊고 쇠못이 박힌 스노우타이어로 바꿔 끼웠다. 다소 흥분된 준석은 상기된 마음으로 큰길로 나왔다. 도로 위에는 여기 저기 차량들이 멈춰 서 있었고, 가끔 접촉사고로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 평상시 같았으면 짜증스런 장면이겠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정겹게만 보였다. 아이들과 같이 눈싸움을 하던 때가 그립기도하였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고 있었다.
눈 모자를 쓴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깜박이는 것이 어느 유행가 가사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차 안 테잎에선 미지의 야릇한 선율이 흘러 나왔다.
이니그마 의 AGE OF LONELINESS 마치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여운을 남기며 간장을 녹일 듯 넘어가는 음률은 애절하고 성스럽기까지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준석은 좋은 곡이 있으면 테잎이나 씨디에 편집해서 듣곤 하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운전을 차분히 할 수 있어 차에선 늘 크래식을 듣는 편이다.
눈 내리는 걸 축복이라도 하듯이 음악은 더욱 감미로운 선율로 바뀌고 감성에 젖은 준석의 마음도 한층 더 유연해지고 있었다.
함박눈이 도로 옆 가로수위에 수북이 쌓인 것이 몇 30년만에 많이 내리는 폭설이라는 방송이 거짓은 아닌듯 했다.
준석은 아내인 경숙과 선보던 날도 지금처럼 이렇게 함박눈이 많이 내린 기억이 났다.
그가 경숙과 결혼 할 때는 그저 소박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었는데......
1973년 겨울.
준석의 이웃에 살고 계시던 경숙의 작은어머니가 그들을 중매했다.
날씬한 키에 이목구비가 또렷해 준석은 첫눈에 호감이 갔다.
패기 발랄해보이며 풋사과 같은 신선함이 한눈에 들어 왔다.
특히 그녀가 피난시절 준석을 돌봐줬던 순이 누나를 닮았다는데 더 친밀감이 갔고 자식 교육도 엄하게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은 고상한 인상도 받았다.
그녀가 운동을 좋아한다기에 처음 만나 서먹함을 없애기 위해서 선 본 다음날 그들은 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고등학교 시절 전국 동계 체육대회 때 일등한 적이 있는 준석은 경숙에게 은근히 자랑이 하고 싶었다.
경숙과 경숙을 중매한 그녀의 작은어머니와 준석 셋이서 도착한 곳은 태능 스케이트장이었다.
눈이 와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들뜬 기분으로 얼음을 지치고 있었다.
준석은 스케이트 끈을 매며 경숙에게 슬며시 말을 건넸다.
\"저...... 실은 스케이트를 못 타요. 좀 가르쳐 주세요.\"
그는 경숙에게 가르쳐 주길 청했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준석의 솜씨를 알리 없는 경숙은 우쭐하며 흐믓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녀는 얼음위에서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만만해했다.
준석은 가슴이 쿵쾅대며 괜히 신이 나고, 슬슬 장난기가 동하기 시작했다.
\"자, 저를 보고 따라 하세요.\"
그녀는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보였다.
준석은 경숙이 시키는 대로 아장아장 따라서 하다 말고 우뚝 섰다.
\"에이, 이렇게 쉬운 것 말고요. 이런 거라면 막 달릴 것도 같은 데요.\"
준석은 두발로 펄쩍펄쩍 뛰어 보였다.
경숙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많이 연습을 해야 해요.\"
\"알았어요. 더 연습을 할게요.\"
준석은 다시 저 만치 앞으로 걸음마를 하며 갔다.
한 여학생이 뒤뚱거리며 지나가다 '꽈 당' 경숙과 부딪쳐 둘은 얼음판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엉덩이가 아팠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서로들 쳐다보고 있었다.
준석이 쳐다보자 경숙은 아예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준석은 걸음마로 다가가 경숙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옆에 넘어져있던 여학생이 일어서려다 또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학생의 출렁거리는 머릿결은 유난히 빛에 반사되었다.
준석은 넘어진 여학생에게도 손을 내 밀었다.
여학생은 몸이 날씬해서인지 준석의 손을 잡고 쉽게 일어섰다.
그 여학생이 신고 있던 은백색 스케이트 날이 반짝 빛났다.
단발머리 여학생은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발목도 펴지 못한 채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저기서 넘어지고 일어나느라 분주한 모습들도 준석에게는 흐뭇하기만 했다.
경숙의 옆으로 다가선 준석은 슬며시 말을 걸었다.
\"이제 조금 되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연습하면 시합해도 될 것 같은 데요. 몇 바퀴 돌고 와서 시합합시다.\"
준석은 은근히 시합하기를 부추겼다.
\"아직 안돼요. 며칠은 연습하셔야 할 거예요.\"
경숙은 마치 선생님처럼 준석에게 지시하듯 말했다.
\"알았어요. 더 연습할게요. 난 운동신경이 예민한데......\"
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혼자 어슬렁어슬렁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숙은 준석에게 보라는 듯 '칙 칙' 하고 얼음을 지치며 앞서 나갔다.
납작 엎드린 폼은 그런 대로 괜찮았으나 속도감은 없어 보였다.
잠시 후 그들은 작은어머니 계신 곳에서 만났다.
작은어머니는 서로 잘 어울리는 걸 보고 흐뭇해하며 준석에게 말했다.
\"많이 배웠어요?\"
\"네, 이제 시합해도 될 만해요. 난 운동에는 소질이 좀 있거든요.\"
경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진짜한번 해 보실래요?\"
경숙은 자신 만만하게 웃었다.
\"좋아요. 그럼 영화구경 내기할까요? 작은어머닌 심판을 봐주세요.\"
준석도 신이나 말했다.
두 사람은 얼음판에 나란히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작은어머니가 손을 올렸다 내리면 400미터 링크를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다.
준석은 경숙을 인코스에 서게 하고 그는 아웃코스에 섰다.
작은어머니가 '땅' 하고 손을 내리자 경숙은 튕기듯 얼음을 차고 달렸다.
준석도 경숙이 볼 수 없도록 뒤를 천천히 따라만 갔다.
전국체전에서 1등한후 가장최근에 타본것은 군대에서 선수생활 할 때 타보고 처음 타는 거였지만 곧 옛날 실력이 나왔다.
준석은 경숙의 뒤를 따라가다 사람들 틈을 이용해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앞질러 작은어머니 앞에서 멋지게 골인을 했다.
\"아니 이렇게도 잘 타! 이 스케이트장에서 제일 잘 타네, 폼도 멋지고.\"
먼저 골인한 준석을 보고 경숙의 작은어머니는 놀란 듯 반색하며 말했다.
잠시 후 경숙이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다.
경숙은 서 있는 준석을 보고는 주춤 멈춰 서고는 준석을 향해
\"왜 아직 안 탔어요. 못 타도 힘껏 노력을 해 봐야 지요.\"
경숙은 몹시 실망했는지 준석을 쳐다도 안보고 작은 어머니 뒤로 숨듯이 옮겼다.
작은어머니는 웃기만 했다.
그는 작은어머니에게 눈을 껌벅여 보이고는 경숙에게 다가가 말했다.
\"미안해요. 졌으니, 영화 구경은 제가 시켜드릴게요.\"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작은어머니는 돌아서서 어깨가 움직일 정도로 킥킥거렸다.
\"이번엔 저녁식사 내기를 하지요.\"
그는 다시 한번하자고 제의를 했다.
\"싫어요. 타지도 않으면서...\"
\"이번엔 정말 탈게요. 대신 두 바퀴 돌아요, 미안해요.\"
\"좋아요.\"
경숙은 첫 만남이라 그런지 쿨 하게 이해심을 보였다.
두 사람은 다시 출발선에 나란히 섰다.
웃고 계시던 작은어머니가 손을 올렸다 내리자, 경숙은 조금 전과 같이 '쌩' 하고 달려 나갔다.
준석은 경숙의 뒤를 따라서 여기저기 구경도 해 가며 여유를 부렸다.
경주하듯 타는 학생들, 다정하게 손을 잡고 타는 연인들, 링크 한 가운데선 여자아이들이 피겨를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는 모습들, 모두들 행복해 보였다.
여유롭게 타고 있는 준석의 앞에 한 남학생과 여학생이 넘어져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남학생은 벌떡 일어났으나 여학생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경숙과 같이 넘어졌던 그 여학생이었다.
준석은 그냥 지나칠까 하다 여학생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고 일어서다 다시 넘어지려 할 때 그는 학생을 부축하듯 잡아 주었다.
여학생은 얼굴이 빨개졌다.
\"고마워요.\"
그 여학생은 좀 전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준석은 그런 여학생의 모습에서 예의가 바른 학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얘, 정인아!\"
친구인 듯한 교복입은 여학생이 손을 흔들며 부르고 있었다.
'정인? 이름과 얼굴은 예쁜데 운동신경은 꽤 둔하군' 준석은 중얼거렸다.
경숙이 저만치 앞장서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시합하듯 멋진 폼으로 신나게 달렸다. '찍 찍 찍 찍'
준석은 서로 손잡고 타는 여자아이들을 피하느라 옆으로 이동하는 순간, 탄력이 붙은 그는 그만 경숙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그때 경숙은 준석의 날렵하고 멋지게 얼음을 지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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