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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목 (갈등) 제27편
김병국 2016. 07. 21. 오후 06:34
4942
김병국 2016. 07. 21. 오후 06:34
4942
정인은 그가 병석에 누워계신데 차마 남편과 혜여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정말 요숙을 사랑하는지를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격한 감정에 울음이 터져 나와 입을 막은 채 병실을 뛰쳐나와 한동안 병실 벽에 기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수경이가 불렀지만 그녀는 자꾸만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 할 수 없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흐르는 수돗물과 같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에게 쏠렸지만 그녀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수경은 정인을 진정시켜 간신히 차에 태웠다.
두 사람은 차안에서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게 옆자리에 넉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인아 술 한잔할래?\"
\"......\"
정인은 그저 고개만 흔들었다.
\"그래, 그럼 진정하고 들어가 푹 시고 내일 전화할게.\"
수경은 정인을 집으로 들여보내고 가슴이 아팠다.
정인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들고 있던 핸드빽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사소한 그녀의 소지품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준석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사준 싸구려 악세사리도 저만치 내동댕이 처져 있었다.
정인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악세사리를 집어 들었다.
정인은 거울앞에 앉아 목거리를 목에 드르고는 넋이 빠진 듯한 한 미친 여자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눈물로 얼룩진 거울 속의 그 여자는 너무나 생소한 얼굴이었다.
화장대 앞에 놓인 액자 속의 경철이가 자신을 비웃듯 웃고 있었다.
그녀는 액자를 집어 들어 벽을 향해 던져 버렸다.
유리가 깨어져 조각이 났으나 경철인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정인은 준석을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 졌다.
그녀는 침대에 엎어져서 짐승처럼 꺼이꺼이 소리 내기도하고
북받치는 설음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몸부림치고 있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머리가 아파 왔다.
'띵똥' 며칠 동안 주연이를 데리고 있던 동생 영인이가 주연일 업고 들어 왔다.
\"언니 울었어?“
영인은 언니의 몰골을 보고 무순 대단한 일이 생긴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
\"집안이 왜 이래, 형부랑 또 싸웠어?\"
\"......\"
\"이게 뭐야, 한 살이라도 더 들기 전에 빨리 결심해.\"
영인은 결단성 없는 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나가듯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정인은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고 준석만 바라고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참, 주연이 오늘 열이 나서 병원에 데리고 갔었어. 의사 선생님이 아이가 면역이 많이 떨어져 있데, 주연이 에게 신경을 좀 써, 집에 손님이 와서 데려왔어, 언니, 정신 차려 나 그만 갈게.\"
영인은 언니를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그렇게 말려도 듣지 않는 언니가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영인은 앉지도 않고 선 채로 그냥 나가 버렸다.
정인은 곤히 자고 있는 주연일 자리에 눕히려다 품에 끌어안고 그만 또 울고 말았다.
그녀의 눈물이 딸의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주연이 얼굴에 눈물이 떨어지자 주연이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엄마의 눈물을 닦아 주더니 엄마 품에 파고들며 다시 잠이 들었다.
정인은 아무 생각 없이 쌔근쌔근 자고 있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준석의 딸들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들의 환한 얼굴에 뒤이어 준석의 웃는 모습도......
뒤따라 요숙의 빈정거리는 듯한 웃음도......
정인은 순간순간 요숙이 생각만하면 준석이 미워지기도 했다.
'그래 이제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잊어야 해.'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체면을 걸듯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잊어야 해, 잊어야 해, 모든 게 꿈이었어. 나는 환상을 쫒고 있었던 거야. 아니야, 아니야. 그이가 보고 싶어.'
'그를 만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래 살 수 있지. 그를 만나기 이전에도 나는 살았어.'
'그게 산거야? 그냥 살아 있었던 거지.'
'몰라, 몰라.'
'어쨌든 나는 살아 있었어.'
정인은 수 없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주고받으며 고개를 내 저었다.
정인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더니 속이 메슥거려 토할 것만 같았다.
화장실에 달려갔으나 헛구역질만 날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째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냉수를 한 컵 마시고 그이가 알려주었던 두유를 한 컵 마시니 겨우 속을 진정 되었다.
눈은 아린 듯 따가워 오며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문갑 서랍에서 준석이 조제해준 허브향 주머니를 꺼내 놓고 향기에 취해 겨우 잠이 들었다.
준석은 인기척에 눈을 떴으나 꿈인지 생신 지 몽롱한 채 잠이 깔린 눈을 다시 감았다.
'저예요' 꿈속에서 정인이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준석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잠시잠간 기억상실증에 있었던 머리도 개운해져 왔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 화병엔 분홍색 장미꽃만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정인아!......\"
정인이가 좋아하는 장미꽃을 누가 갔다 놨을까?
정인이 이름을 불렀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준석은 턱을 받쳐 놓았던 기부스를 풀었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기쁜 것을, 준석은 아무에게나 말을 하고 싶었다.
싱싱한 장미를 한 다발 안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그 꽃은 누가 갖다 주는 거예요?\"
준석이 이 병원에 와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꽃병에서 시들어 가는 장미를 꺼내려다가 장미 다발을 든 채 그에게로 다가왔다.
물씬 풍기는 싱그러운 향기는 잠시 그의 숨을 멈추게 했다.
준석은 그녀가 들고 있는 장미향을 맡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간호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향이 좋죠?\"
간호사는 준석에게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 장미는 누가 ?\"
준석은 장미향을 가슴깊이 들이마시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심부름으로 꽂아줄 뿐이에요. 비밀로 하랬는데...\"
\"다음엔 그분 이름을 알아봐 주세요.\"
\"네, 물어볼게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꽃병에 장미를 꽂아 놓고 나갔다.
준석은 장미를 전해주는 사람이 혹시 정인이 아닐까? 정인이 였으면 좋겠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가 나가자 혼자 있는 병실에 공허함을 느낀 그는 이런 상태로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한 달이 지나 그의 상태는 호전되어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병실이 옮겨지고도 한동안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던 순간들이 수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준석에게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에 대한 준석의 마음이 조금씩 희석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그토록 가슴 저며 오던, 마음과 안타까움을 그는 제법 참을 수 있을 만큼 담담해 지고 있었으나 가슴 저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정인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날이 가면서 참아 왔던 아픔은 그를 인내 할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희석시키고 있었다.
그의 파릇한 마음은 단풍이 물들듯 붉게 변하고 있는 것일까?
준석은 정인이도 아마 지금쯤 자기와 같은 마음 이었으면 좋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전화로 들었던 싸우던 소리, 가끔 그녀의 팔이나 다리에 퍼렇게 멍이 들었던 것들이 자기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옥죄어 왔다.
그녀 여동생의 낭낭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준석은 정인을 그만 가정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녀를...... 진정 사랑한다면 보내야만 하는 것일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잡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준석의 머리는 무거웠다.
그는 사춘기에 있는 두 딸과 달라진 아내를 보며, 이제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생각으로 그의 마음은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정인에 대한 미련은 깊어만 가는 것일까? 그녀를 미워할 수 없기에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인가!'
준석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덕스런 자신의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들을 오직 그런 고민에 시름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병실에 와서 아빠를 위로해도 별다른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결단성 없는 결심을 그는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정인에게 자신의 다친 모습을 보여 걱정을 끼치고 싶지가 않았다.
빨간 장미꽃을 한아름 가슴에 안고 병원으로 들어서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이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의사 수업을 받고 있는 윤지혜 였다.
지혜는 어느 날, 정형외과 병실 복도를 지나다가 김준석이란 환자 명패를 보았다.
혹시나 하고 병실에 들려본 그녀는 놀랍게도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분이란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담당의사 에게 상태를 물어 보았다.
다행히 몇 달간의 치료를 요하긴 했으나 신체의 이상은 없을 거라 했다.
그녀는 바쁜 와중에도 가끔씩 그의 병실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그가 사랑하는 정인이가 있어 그를 향해 움트는 사랑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의 병동이 그녀가 근무하는 내과 병동과 많이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그의 사생활을 알고 있는 그녀로선 그의 식구들을 대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지혜는 간호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꽃을 보내고 담당의를 통해 상태를 물어보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은 그가 깁스를 푸는 날이라 지혜는 빨간 장미를 준비했다.
지혜는 그렇게라도 해야 지난날 그에게서 받은 깊은 사랑에 보답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준석은 입원한지 두달 가까이 만에 다리에 깁스를 풀었다.
이제는 목발을 짚고 혼자 걸을 만 했다.
입원실 복도 끝에 있는 공중전화 앞까지 그는 운동을 핑계 삼아 하루에도 몇 번씩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다음 주 중 퇴원하게 될 거예요.' 담당의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몇 달을 참았는데 그깟 한 주를 못 참으랴.'
준석은 퇴원해서 정인에게 연락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퇴원을 앞둔 하루하루가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이 그에겐 너무나 지루했다.
유난히 밝은 아침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던 어느 날, 까치의 울음소리가 플라타너스 저편에서 들려 왔다.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옆에 있던 환자가 말했다.
그는 운동을 하다 허리를 다쳐 들어온 유도선수였다.
\"허리는 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그는 준석이 알려 준 방법으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한결 시원한 것 같아요.\"
그도 허리를 좌우로 움직이며 기분이 좋아 보였다.
회진시간에 담당 의사와 인턴 여러 명이 들어왔다.
\"자 어디 봅시다.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담당 의사는 준석의 다리를 고무망치로 톡 톡 때리며 물었다.
\"네 없습니다. 다리에 연결 쇠가 들어간 것이 좀...\"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나중에 제거할겁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체크를 하더니 준석에게 말했다.
\"퇴원하셔도 되겠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간 간호를 하시느라 고생이 많았지요? 어서 가셔서 퇴원 수속을 하십시오.“
담당 의사는 준석의 처제에게 말했다.
\"예, 고맙습니다.\"
그들이 우루루 나가자 간호사가 다시 들어 왔다.
\"축하합니다. 오늘 퇴원하시죠?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환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저......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준석은 간호사와 잠시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녀의 친절이 고맙기도 했고, 꽃을 가져온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고도 싶었으나 처제가 옆에 있어 그만 두었다.
준석은 이제 깁스를 풀었으니 정인을 만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온통 들떠 있었지만 예전처럼 설레이지는 않았다.
작은 목발을 짚고 처제의 부축을 받으며 그의 집 대문을 들어섰다.
그의 손때 묻은 정원석과 정원수도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낯익은 그의 집이지만 웬지 그에게 서먹하게 다가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준석의 눈앞엔 흰 종이에 '아빠의 완쾌를 축하합니다.' 라고 쓴 글이 벽에 커다랗게 붙여져 있었다.
교자상 위엔 초코 케익이 놓여져 있었고, 그 케익 위에 '축'이라는 하얀 글씨가 써있었다.
그 글자 바로 밑에 고르지 못한 글씨로 '아빠 사랑해요' 라는 글씨를 보고 준석은 그만 코끝이 찡해 왔다.
그 삐뚤어진 글씨들이 왜 그를 울리는 건지, 준석은 다시 한 번 가정의 소중함을 느꼈다.
두 딸이 달려와 \"아빠! 이제 안 아파요?\" 하며 조그만 손으로 그의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만져 보며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랑스런 두 딸을 보며 준석은 지나온 자기의 생활이 부끄러웠다.
그토록 못마땅해 하던 처제도 전보다는 적극적이고 상냥해졌다.
연지가 담아 준 케익 한쪽을 받아 들고 그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딸들에게 글썽거리는 못난 아빠를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케익 담은 접시를 머릿장에 올려놓고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낯익은 천정의 무늬를 바라보았다.
준석은 아이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가정에 안주하고 싶었다.
갑자기 피곤이 엄습해와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너희들 아빠에게 귀찮게 하지마\" 이모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 이모!\" 연주가 대답했다.
\"너는?\" 이모는 연지를 보며 다그쳤다.
\"난 싫어, 아빠하고 같이 놀 거야. 이모는 매일 교회만 가고\"
연지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처제는 아이들이 왜 아빠와 같이 있고 싶어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처제는 언니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한때는 형부인 준석을 무척이나 원망하고 있었다.
언제인가부터 준석의 인품을 알게 되면서 언니를 대신해서 형부를 성의 것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때는 종교를 핑계 삼아 아이들에게 소홀했던 자신의 종교생활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언니의 죽음에 대해 형부가 언니의 한을 풀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명진 오빠와의 관계도 형부에게 어떻게 오해를 풀어드려야 하는지도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준석은 12시간을 원도 없이 잔 것 같았다.
\"형부! 할머님 전화예요.\" 무선 전화기를 두 손으로 건네주는 처제는 전과 다른 행동에 준석도 한결 기뻤다.
\"몸은 좀 어떠냐?\"
\"거의 다 났어요. 어느 정도는 걸을 수 있어요.\"
\"그래 몸 조리 잘하고. 참, 연주이모가 이번에 고생을 많이 했다. 네가 잘 대해 줘라, 아버지랑 며칠 있다 가마.\"
\"예, 알았어요.\"
준석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조금 전 처제의 그 상냥한 태도에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 보였다.
처제와의 냉각기를 서서히 녹이고 있었다.
준석은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리움이 치밀어 올랐다.
가끔씩 조금에 여유로운 시간만 있어도 문득 문득 정인과의 행복했던 시간들이 생각나고 있었다.
‘정인아--’ 그는 마음속으로 정인을 아직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준석은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었다.
몇 주가 지나 준석의 몸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 왔다.
조금씩 인내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울컥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처럼 그의 감정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댔다.
그는 그녀와의 추억이 서린 여기저기를 차를 타고 다니면서 목이 터지도록 아무 소리나 마구 질러 댔다.
텅빈 옆자리를 보며 가슴이 더욱 아려왔다.
“정인아--- 행복하게 살아---”
준석은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힘이 없어 지칠 때까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그녀가 그리워져 그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무언가 가슴에 뭉쳐 있는 것 같은 답답함으로 '욱' 하고 구역질을 한 준석은 목에서 나오는 피를 닦아 내야만 했다.
'한도 끝도 없이 울고 나면 이런 아픔이 가실까?'
준석의 눈에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정인을 잊으려는 그의 노력은 정인을 위해서라고 위로해 보지만 그의 가정도 위함이란 걸 부정하진 않았다.
그의 가정이 화목할 때 준석은 정인에게서 그러한 행복을 빼앗아 온 것 같아 그녀에게 죄스럽기까지 했다.
그녀에게 향한 순수한 사랑이라고 여겼던 그의 사랑도 도덕적인 틀을 벗어날 수 는 없었다.
준석은 그녀와 같이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정인은 그의 팔짱을 낀 채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쳤던 지난날들이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건만, 성냥을 그어 댄 준석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간신히 사진에 갖다 댔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칼로 에이는 듯한 아픔에 그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준석은 눈만 뜨면 창밖으로 보이는 정인과의 추억이 깃든 길모퉁이 찻집과 음식점, 그리고 그의 일터였던 한방병원을 더 이상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보금자리이기도 했고, 그의 어린 딸들의 꿈이 담긴 곳이기도 했지만, 이젠 그만 신촌을 떠나고 싶었다.
그 해 가을 준석은 일산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러는 가운데 정인은 계속 방황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잊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정인은 준석을 잊으려고 못 마시는 술을 취하도록 마셔도 보았으나 오히려 그녀의 눈앞엔 온통 준석의 얼굴만 아른거렸다.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가서 미친 듯 춤을 추어도 보고 그가 없는 먼 곳으로 여행도 해 보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멀어 질수록 마음은 더욱더 그에게로 가까이 달려갈 뿐이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생각이 나는 것은 인간의 심리인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몇 번이고 그가 없는 병원 앞에서 서성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되돌리곤 했다.
하루 종일 약에 취한 듯 멍한 상태로 그녀는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전화 벨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 그의 전화를 기다려 보지만 전화는 매번 그녀를 실망 시켰다.
그러나 주체 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로 두 눈은 빨갛게 충혈돤 채 짓물러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서 치미는 답답함으로 숨을 몰아쉬는 증세가 나타나고, 식욕도 없어지며 소화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한 정인을 보다 못한 수경은 대학시절 정인과 둘이 시샘을 하며 좋아했던 법대 선배 진수를 생각했다.
어쩌면 진수 선배가 정인의 이런 기분을 바꿔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다이얼을 돌렸다.
\"정인이가 요즘 힘들거든요, 기분 전환 좀 시켜 주세요.\"
\"알았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니 그냥 좀...\"
\"일단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하지, 내가 조금 이따 아파트 근처 레스토랑으로 갈게\"
수경은 기분도 바꿀 겸 정인에게 차 마시러 나가자고 했다.
\"난 나가고 싶지 않아\"
정인은 모든 것이 귀찮은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 가서 차나 한잔하고 오자, 집에서 우두커니 있으면 뭐하니?\"
수경은 정인을 강제로 끌고 나가다 시피 했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진수를 본 정인은 걸음을 멈칫했으나 그가 앉으라는 말에 의자 한쪽 끝에 앉았다.
진수는 선약이 있었지만 두 공주를 만난다는 즐거움에 약속을 다음으로 미뤘다고 생색을 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안됐어, 무슨 일 있어?\"
진수는 양손을 테이블 위에 턱 뻗치고 마치 누구든 손을 봐줄 자세였다.
\"......\"
정인은 진수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얘가 글쎄...\"
수경이는 정인의 상황을 말하려 했다.
\"수경아, 너 정말.\"
수경은 정인이가 정색을 하고 일어나 말꼬리를 흐려 버렸다.
그녀는 당황해 정인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알았어. 그런 얘기 안 할게.\"
진수는 나중에 수경에게 따로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차 마셔, 이 집에 차맛이 괜찮네.\"
진수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정인은 핼쓱하긴 했으나 예전처럼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카페에선 준석의 차에서 늘 들어오던 쎅스폰으로 연주하는 라깐쏘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인은 울컥 치미는 그리움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페 앞 가로등에 기대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인아! 너무 상심하지마\"
진수는 언제 나왔는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선배, 나는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
진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정인을 달래고 있었다.
수경이가 밖으로 나와 정인이를 부축했다.
\"머리가 아파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응, 그래 어서 데리고 집으로 가\"
\"진수선배 다음에 봐요.\"
집에 돌아온 수경은 어쩌면 한심하게도 보이던 정인이가 오늘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전복죽을 끓여 놓고 먹으라고 채근이지만 정인은 도무지 목이 메어 아무것도 넘길 수가 없었다.
정인은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허탈감에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수저를 들고 앉아 눈물만 줄줄 흘리는 친구를 보다 못한 수경이도 정인을 붙들고 같이 울고 말았다.
수경은 정인을 데리고 이리저리 다녀 보지만, 정인에겐 그런 일이 조금의 위로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리도 지독하단 말인가!’
수경인 준석을 찾아가 정인의 상황을 알리고 싶은 충동을 몇 번씩이나 느꼈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면 한번은 치러야 하는 과정이라고......’
준석을 만나 찾았던 행복은 이제 너무나 큰 슬픔으로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정인은 차라리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숨이 끊어졌으면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에의 유혹도 받았다.
하지만 어린 딸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남편은 남편대로 굵은 동아줄처럼 그녀를 더 칭칭 옭아매고 있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의 연속으로 정인은 몸 속에서 병만 키워 가고 있었다.
'그토록 영원하리라 여겼던 그들의 사랑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가!......'
정인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점점 삶에의 의욕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경이 집에서 커피를 마시던 정인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수경은 너무 놀라 정인이 평소에 다니던 병원 응급실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는 창백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인은 응급조치를 하고 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정인은 가운을 입은 지혜를 보고 힘없이 손을 내 밀었다.
\"이 병원에 근무하세요?\"
\"네, 무슨 일이에요?\"
\"과로를 했나 봐요.\"
지혜는 담당 의사를 만났다.
\"무슨 병이에요?\"
\"좀 더 두고 봐야 합니다. 우선은 입원을 시키는 것이 좋겠어요. 조직검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직검사라면...\"
\"위에 혹이 있어요.\"
정인은 그 날부터 입원을 하고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검사에 들어갔다.
댓글 1개
이정현
2016. 07. 23. 오후 08:13
작가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그의 파릇한 마음은 단풍이 물들 듯 빨깧게 변해 간다는 표현이 맘에 아프게 다가 오네요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새 글이 혹시 또 올라왔나 수시로 들어와 봅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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